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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도시는 온통 회색 빛이다.
번화가의 번쩍이는 네온 불빛과 떠들썩한 말소리가 닿지 않는 어둡고 좁은 골목, 모퉁이에 세워진 낡은 차 안에 앉은 민준이 맞은편 주택의 대문을 쳐다보고 있다. 까슬한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굶주린 들짐승이 먹잇감을 노려보듯이, 눈빛만이 집요하다.
민준은 30대 후반, 한때는 촉망받는 사회부 기자였지만 ‘그날’ 이후 글을 쓸 수 없었다. 그의 사정을 헤아리고 기다려주던 회사는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기를 살아남지 못했다. 신문사는 문을 닫았고, 자연스레 민준도 실업자가 되었다. 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껍데기만 남았으니까.
‘그날’, 수아가 죽었다.
두 살 어린 여동생 수아는 민준에게 태양 같은 존재였다.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민준에 비해, 수아는 따뜻하고 낙관적이었다. 그녀의 웃음은 전염성이 있었고, 성격은 순수하고 여렸다. 한 배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달랐지만, 정반대의 성격 탓인지 여느 남매답지 않게 사이가 돈독했다.
수아는 미술을 좋아했고, 어린이 책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는 꿈을 키웠다. 수아는 민준에게 자신의 스케치를 보여주며 의견을 물었고, 민준은 수아에게 최근 취재거리에 대해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깊은 밤, 민준은 여동생에게서 영감과 위로를 동시에 받았다. 완연히 다른 세상에 살았지만, 그에게 수아는 비밀을 나누는 상대이자, 도덕적 나침반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수아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찍이서 홀로 정류장에 앉아 있던 그녀를 목격한 시민도 있었다. 하지만 수아는 결국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민준에게 수아의 죽음은 교통사고처럼 무방비로 들이닥쳤다. 하나뿐인 그의 여동생이 온 도시를 공포에 몰아넣던 연쇄살인범의 최신 희생자가 된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 연쇄살인이 일어났어도, 본인이 기자라서 상황을 남들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는 오만 때문이었을까, 민준은 자신도, 수아도 늘 범죄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 여겼다. 범인은 긴 머리의 2030대 여성을 노렸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허리까지 오는 수아의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을 것이다. 경찰이 발견한 수아의 시신은 참혹했다. 그 여린 아이가 혼자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까, 민준은 누이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 반쯤 미쳐버렸다.
그렇게 민준의 세상은 산산조각 났다. 슬픔, 분노, 상실감은 그를 집어삼켰고, 혼란스러운 감정은 곧 집착으로 변했다. 그는 범인을 찾는 일에 사로잡혔다. 한때 직관이 뛰어나던 기자는 동료들로부터 멀어졌고, 경찰 보고서와 뉴스 기사, 그리고 사건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찾으려는 메모들 속에서 밤낮이, 매일이 뒤섞였다.
수아의 죽음은 민준을 깊은 우울에 빠뜨렸다.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잠에 들더라도 악몽이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머릿속에서 수아가 겪었을 끔찍한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민준은 자신을 책망했다. 늦은 밤 동생을 데리러 가지 않은 것, 그날 밤 택시를 타라고 권하지 않은 것, 그리고 남매간의 사소한 말다툼 하나하나까지.
기자로서 그의 커리어도 망가졌다. 기사는 쓰이지 않았고, 마감일은 번번이 지나갔다. 민준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피했고, 친구들이 다가오는 것도 차단했다. 그들의 위로는 공허했고, 그들의 삶은 산산조각 난 자신의 인생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경찰이 주요 용의자로 송모씨를 체포했을 때, 비로소 작은 희망이 생겼다. 용의자의 신변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민준은 기자 시절 인맥을 통해 그의 이름과 얼굴을 알게 되었다. 송현우. 그는 범인에 어울리는, 아니, 딱 맞는 사람이었다. 변변찮은 직업 없이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외톨이였고, 십 대부터 폭력 범죄에 연루되어 전과가 있었으며, 사건 당시 알리바이도 모호했다.
아주 잠깐, 민준은 정의가 이루어질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진범이 합당한 처벌을 받고, 수아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부 피해자 시신에서 발견된 남성의 DNA와 송현우의 DNA는 일치하지 않았다. 경찰은 정황 증거 외 확실한 물증이 없었고, DNA 검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 결국 증거 부족으로 송현우는 풀려났고, 유력한 용의자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가 풀려나던 날, 민준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집 안의 가구를 죄다 부숴버렸다.
그 후 경찰은 100여 명에 달하는 전담 수사팀을 꾸렸지만 1년이 지나도록 다른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했고, 결국 사건은 장기 미제 사건으로 분류되었다.
송현우가 풀려난 후, 1-2달 간격으로 일어나던 살인이 갑자기 멈췄다. 이상한 침묵은 시민의 공분을 불렀고, 그에 대해 재수사를 촉구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송현우의 연락처와 주소가 누리꾼들의 추적을 통해 만천하에 공개되었고, 분노한 시민들이 협박 전화를 걸거나 집 앞으로 돌이나 오물을 투척하기도 했다. 과거 행적을 캐는 '신상 털기'도 진행되어, 특히 송현우가 과거 '학폭'으로 퇴학을 당했다는 사실까지 폭로되었다. 이에 경찰은 송현우와 노모의 신변 보호를 시작했다. 경찰 관계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송현우의 어머니는 공포에 질려 어떠한 맞대응도 하지 못했다. 소식이 알려진 뒤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피해자를 보호해야지 왜 가해자를 보호하느냐는 성토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몇 달 후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이 시작되었고, 온 나라가 말 그대로 살아남기에 바빴다. 사건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송현우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민준은 한시도 송현우를 잊은 적이 없었다. 민준은 대중의 무관심과 경찰의 무능함에 분노했다가 어느 순간 질려버렸다. 그는 혼자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송현우는 사람을 무려 7명이나 죽였다. 게다가 2030대 젊은 여성만을 골라 살해하면서도,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성범죄는 한 번도 저지르지 않았다. 사건을 조사하면서 민준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송현우는 단순히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그런 사이코패스라면 살인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 그는 반드시 또 사람을 죽인다.’
민준은 혼자 송현우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가 8번째 피해자를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라고 확신했다. 결정적인 살인 미수의 증거를 잡아 자신의 손으로 송현우를 경찰에게 넘길 것이다. 민준의 탁월한 직감과 탐사 능력은 더 이상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쓰이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이제 오롯이 송현우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사건이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무렵, 송현우와 노모는 자취를 감췄다. 끈질긴 추적 끝에 민준이 그를 찾아냈을 때, 송현우는 노모와 함께 낡은 빌라에 살고 있었다. 대도시의 화려한 고층 빌딩이나 활기찬 거리와는 대조적인, 좁고 어두운 골목에 숨겨진 저소득층 지역이었다. 골목에 드리워진 소외의 그림자는 짙었고, 퀴퀴한 악취를 풍겼다.
며칠 동안 송현우의 집 앞에서 잠복하다 마침내 집을 나서는 그를 발견했을 때, 민준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무죄추정의 원칙 따위는 잊혀진 지 오래였다. 민준의 마음속에는 이미 송현우가 진범이었다. 이제는 수아의 악몽을 꿀 때도, 죽어가는 수아의 옆에 피 묻은 칼을 쥔 채 웃고 있는 송현우가 보였다.
이후 민준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그 빌라를 멀리서 감시하며 보냈다. 송현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며, 일상에서 벗어나는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폈다. 한 달쯤 지나자 눈을 감고도 송현우를 그릴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며칠 동안 감지 않은 듯 항상 떡진 머리, 공허한 눈빛, 추레한 옷차림에 구부정한 등, 발을 질질 끌듯이 걷는 독특한 걸음걸이까지. 낮과 밤의 경계는 흐려졌고, 민준의 집착도 깊어졌다. 수아와의 즐거웠던 일상도, 기자로서 사명감 넘쳤던 시절도 전생의 기억처럼 희미해졌다. 민준의 삶은 이제 송두리째 송현우뿐이었다.
*The embedded image was generated by artificial intellig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