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텃밭에서 맞이한 나의 완벽한 패배에 관하여 -
퇴근 후 오랜만에 우리 집 옥상에 올랐다. 지난여름, 화분 텃밭에 물을 주기 위해 매일같이 올랐던 곳이다. 비 오는 날에도 올라갔다. 텃밭을 살펴야 했다. 그렇게 여름을 났다.
가을로 접어든 계절에 맞춰, 얼마 전 텃밭을 정리했다. 가을상추나 배추를 심어볼까 했으나, 게으른 도시 농부의 한 해는 이 정도면 족할 것 같아 관두었다. 다만, 다년생의 블루베리나 부추, 원추리 화분에는 가끔 물을 주어야 한다. 더 이상 물을 줄 필요가 없어지면, 겨울이다. 그렇게 일 년을 보내면 된다.
올봄 들어 처음 푸른빛을 내보인 것은 부추였다. 이미 오래도록 매해를 그리 한다. 화분이란 좁은 터에 의지해 겨울을 나면서도, 어김없이 새로 돋는 부추 싹을 보며 난 비로소 봄을 알아챈다.
부추가 한 뼘 정도 자라 칼을 들었다. 가늘고 여린 잎들을 밑동부터 바싹 잘랐다. 그렇게 두어 줌 챙긴 것으로 전을 부친다. 물에 잘 씻어 손가락 두 마디쯤으로 썰고, 반죽에 얹혀 들기름에 지져냈다. 접시만 하게 두 장을 만들면 된다. 겨우내 담근 청주 한 병과 함께 조용한 봄의 잔치를 만끽했다.
보드라운 부추의 식감은 수확에 대한 잠재적 욕망을 불렀다. 동네 시장에서 상추와 치커리 모종을 사다 심었다. 욕심이란 부정적 감정은 때론 부지런함이란 긍정적 결과를 낳기도 한다. 흙을 뒤집고, 거름을 채우고,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풀을 뽑는 모든 행위는 자발적이었다.
그렇게 심은 것들은 더딘 성장기를 거친다. 그러다 '이거 이래서 언제 따먹나' 싶은 생각이 들 때쯤 폭발적으로 키가 컸다. 돌아앉으면 이파리 수도 늘어나 있었다. 쌈으로 먹고, 가볍게 무쳐 먹고, 가늘게 썰어서 비빔밥 해 먹고, 된장국에도 넣어 먹었다.
다른 집에 나눠도 줬다. 그 작은 공간의 생산력이 놀랍기만 했다. 먹어 치우기 위한 싸움이 내 패배로 거의 확정될 즈음 그것들이 꽃대를 올렸다. 속으로 '이러면 무승부'를 외치며, 한 포기씩만 남기고 정리했다. 그 씨앗이 자라 떨어지면 내년엔 모종을 심지 않아도 된다.
작은 욕심으로 멈추면 좋으련만, 늘 커지기 마련이다. 상추와 드잡이 중에 여름이 코 앞이었다. 여름 채소라는 공심채와 적근대를 파종했고, 이내 싹을 틔웠다. 하지만, 적근대는 너무 늦었던 모양이다. 자주 내리는 비와 뜨거운 태양에 그만 녹아버렸다. 우산도 씌워보고, 그늘로도 옮겨봤으나 더는 크지 못했다.
그와 달리 공심채는 씩씩했다. 남쪽 나라 출신답게 그 많은 비와 태양빛이 양분이 된 모양이다. 오래지 않아 수확이 가능했다. 역시 열심히 먹었다. 주로 볶음요리에 사용한다. 줄기의 아삭함과 이파리의 부드러움이 다른 요리 못지않았다. 그러다 두어 번 수확 시기를 놓쳤다. 키가 훌쩍 자라 버리고 줄기수가 급격히 늘었다. 우리 집 옥상은 어느덧 공심채 정글이 됐다.
너무 웃자란 줄기를 제외하고 몇 번 더 수확해 먹었지만, 9월 들어 손을 들고 말았다. 이번엔 완벽한 패배였다. 그런 내 모습을 바로 옆 블루베리 나무가 보고 웃는 듯했다. 우리 집 옥상을 지키며 그 모습들을 지켜보는 나무다. 물 주느라 수고했다며 여름내 작은 열매를 나눠준다. 한꺼번에 주지 않고 매일 조금씩 준다.
그런데 이제 보내줘야 할 것 같다. 세 그루 중 두 그루가 전 같지 않다. 꽃은 피우는데, 열매를 거의 맺지 못한다. 해걸이라 믿고 싶었지만, 이미 몇 년이 지났다. 이젠 스스로도 힘들 것이다. 올 겨울엔 베어야겠다. 너무 오래 붙잡은 것 같아 되레 미안하다.
잡초처럼 혼자 자라서 화초 같은 어여쁜 꽃을 피우고 다시 조용히 사그라지는 것 하나가 원추리다. 아주 오래전, 어느 무덤가에서 캐어온 야생화다. 내가 무슨 짓을 하건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기척 없이 크고 꽃을 피운다. 다른 꽃 못지않게 화려하지만 한 번도 가볍지 않았다. 여름내 울적할 때면 그 꽃을 보러 갔다.
그렇게 정리하고 사그라든 것들을 빈 화분 두 개에 나눠 넣었다. 이제 두 계절 동안 잘 삭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년에도 봄이 오면 또 내년 것들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명은 다른 생명들의 생명이 된다.
봄에 제일 먼저 고개를 든 부추가 제일 늦게 꽃을 피웠다. 가늘고 곧게 뻗은 초록의 꽃대 위에서 마치 폭죽 터지듯 꽃을 피운다. 순백색의 그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의 색도 조금은 옅어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