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산 쌍계사 탐방기 -
그곳에 가면 꽃이 있으리란 것은 진즉 알았다. 스무 해도 훨씬 더 전에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지난 세월은 짐작하기 어려우나, 그곳엔 그때처럼 꽃이 있을 것이다.
지난 8월의 마지막 날, 충청남도 논산에 들른 길이다. 하고자 한 일을 마치니, 시간도 마음도 남았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서울로 가는 길을 잠시 미루고, 남쪽으로 멀지 않은 쌍계사로 차를 몰았다.
내 기억 속 이곳은 초록빛 논과 함께였다. 그때 버스는 농로 한편에 날 내려놓고 사라졌다. 흙먼지는 덤이었다. 논과 밭과 작은 내를 건너 숲으로 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 여름도 지금처럼 온통, 하늘까지 파랬다. 다만, 이날은 그 길을 차로 오르니 옛 기억은 비로소 추억이 된다.
처음 이곳으로 이끈 것은 그 이름이었다. 쌍계사. 두 계곡 사이의 절이라는 단순 명료한 이름이다. 경상남도 하동에도 같은 이름의 천년고찰이 있다.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IMF 직후 대학을 졸업했고, 취업이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소위 '취준생'이던 나는 늘 마음이 무거웠다. 어딘가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하동까지 가기에는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이름의 이곳을 찾아왔다. 그 기억은 여전히 추억이 되지 못한다.
내 기억과 크게 달라진 모습이 없다. 입구인 2층의 봉황루도, 너무 넓어 휑한 절 마당도, 하늘 높이 내리쬐는 해도 여전하다. 달라진 것은 나와 내 마음 뿐인 듯한데, 그때보다는 조금 여유로울 수 있음은 감사하다.
봉황루는 커다란 돌로 겹겹이 쌓은 축대 위에 올라앉아 있다. 그래서 앞에서는 높다란 2층이지만, 계단을 올라 2층 마루는 절 마당과 높이가 같다. 수행에 지친 스님들이 한숨 놓기에는 좋았겠다 싶다. 다행히 막아두지 않아 신발을 벗었다. 앞으로 높이 트여 눈이 시원하다. 바로 저 바깥으로는 작은 파리 떼가 기승일 텐데 막힘없이 통하는 누마루 위로는 시원한 바람이 가득하다.
별도의 안내문이 없어, 봉황루의 근원은 잘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후기 한 스님의 시에 이미 언급되고 있으니 최소한 현대의 산물은 아닐 것이다. 나무와 돌과 기와를 잘 어울리게 쓰고, 훤칠한 높이에도 그 개방감으로 인해 안정감을 준다. 기둥 위를 연결해 두른 횡대에 용머리가 보였다. 그것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다. 부릅뜬 눈으로 웃는 것인지 위협하는 것인지 표정이 묘하기만 한데,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것은 뉘 뜻일까.
어느 곳이든 우리네 절집에서 무서움을 느껴본 일은 없다. 인왕에게도 사천왕에게도 명부전의 야차, 아귀의 모습에서도 그렇다. 분명 무서움을 느끼도록 의도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 둘 곳 하나 없어 절을 찾은 이에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던 것 아닐까.
다시 마당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살짝 망설여진다. 눈앞으로 펼쳐진 넓이가 너무 크고 휑하다. 마당 저 끝 정면으로 대웅전이 보였지만, 곧장 가기엔 마음이 멀다. 좌측으로 요사채가, 우측으로 종루와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그래도 조금 더 가까우니 오른쪽으로 가보자.
커다란 범종과, 법고, 목어가 보였다. 아마 운판도 있을 것이다. 현판은 한자로 '범종루'라 했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 있다. 이곳에선 최신식 건물이지 싶다. 눈으로만 보고 바로 지나쳐 커다란 나무 아래 섰다. 이곳의 자랑인 '연리근'이다. 두 개의 나무뿌리가 하나로 엉켜 '연리근'이다. 천년의 인연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그때 내 마음에 있던 이는 천년의 인연은 아니었나 보다.
최대한 느리게 걸어 마당을 막 건너갈 즘 명부전이 있고, 한 층 축대 위로 나한전이 있다. 두 건물 모두 공포 하나 이고 있지 않아, 소박하다 못해 허름해 보이기까지 한다. 조선 후기, 시골 동네 어디쯤에서 흔하던 건물 같다. 하지만 그 공간을 향했을, 긴 세월 동안의 순수한 원(願)은 저 허름한 건물에 신성성을 부여한다. 명부전은 저승의 복을, 나한전은 이승의 복을 비는 곳이다. 그 간절한 염원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도, 시간의 틈도 없이 켜켜이 쌓였다.
나한전을 보러 이미 축대 위로 올라왔으니 이제 어쩔 수 없다. 아까워 외면하던 활짝 핀 꽃을 보러 가야 한다. 대웅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열어둔 대웅전 문 앞에서 신을 벗다가 움찔했다. 의지해 기댄 왼쪽 기둥의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잠시 멈춰 다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기둥을 바라보았다. 실로 엄청난 덩치다.
조선 시대 궁궐을 제외하고 이렇듯 굵은 기둥을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다. 내 두 팔로는 턱도 없을 것이고, 성인 남자 두 명은 나서야 겨우 감쌀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거침없이 매끈하게 뻗지는 못했지만, 이미 수백 년은 족할 그 나이테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지금은 단층이나, 원래 2층짜리 대웅전이라 했다. 그 무게를 감당하기 위함이었는지 모르지만, 건물에 들인 정성이 기둥에서부터 알 법하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었고, 선조 무렵에 다시 세웠다는 전승이 있다. 다만 확실한 기록은 영조 때의 중건이다. 선조 때 조성된 삼세불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영조 때의 중건은 수리 목적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둥 위로는 화려한 공포들이 가득한데, 빈틈 하나가 없다. 역시 조선 중후기 건축적 특징이 여실하다.
자칫 무례를 범할까, 법당 안에 든 몸가짐을 최대한 바로 했다. 선조 38년인 1605년 조성된 석가, 약사, 아미타 부처님께 인사를 드렸다. 복장 유물로써 그 조성 시기를 증명했기에, 보물로 지정돼 있다. 부처님 용안 위 닷집들이 참으로 화려하다. 너무 화려해 가끔은 조화롭지 않은 저 닷집을 보면 언뜻 서글퍼진다. 궁색한 절 살림에, 닷집만이라도 화려하게 꾸미고 싶었을 그 시절 마음들이 느껴져서다. 하지만 내 억측이길 바라고 또 바랐다.
이제 굽혔던 몸을 올려 부처님 시선을 따랐다. 그 시선의 끝, 법당의 문은 온통 꽃이었다. 그 오래전 나를 위로했던 바로 그 꽃들이었다. 이젠 누군지 모를 목수의 칼 끝이 피워낸 수천 장의 꽃잎이 펼쳐진다. 연꽃, 난초, 국화, 작약, 목단, 무궁화 등 그만큼씩의 염원을 담은 채 피어 있다. 세월에 색은 바랬지만, 영원히 지지 않을 그 꽃들의 아름다움은 곧 작은 천상 세계다.
문득 꽃을 바치는 의미를 생각했다. 왜 인간은 절대자에게 꽃을 바치는가. 그곳엔 바로 생명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벌과 나비를 불러 모으는 가장 순수한 생명의 상징, 꽃. 그러니 꽃을 바친다는 것은, 나의 생명마저도 온전히 내어줄 수 있다는 절실함의 표현이지 싶다. 목수 역시 수많은 밤을 새우며 그 절실함을 칼 끝에 담아내었을 것이다.
대웅전을 돌아가며 기둥과 벽을 손으로 쓸었다. 그 소재(素材)들은 이미 바짝 말라 있었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그 감정들은 마르지 않았다. 감히 상상하지 못할 그 긴 세월의 이야기들이 그 속에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오늘, 그 이야기에 한 꼭지를 더한다.
대웅전 아래 오른 편으로, 역시 별로 달라진 것 없는 요사채가 보였다. 내려가 가까이 다가갔다. 그 시절 오늘이 떠오른다. 그때, 지금처럼 마당에서 서성이던 나를 스님이 불렀다. 이곳 요사채 퇴칸에 이끌어 수박을 내어주셨다. 감사하단 말 외에 침묵하던 날 보고 스님은 말씀하셨다.
"잘 될 거예요. 잘."
그때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에 없다. 아마 대답을 못했던 것 같다. 고개를 숙인 채 두어 조각 수박을 먹은 후 나는 이 절을 떠났었다. 그때는 잘 몰랐으나, 스님이 내게 한 말은 잠시 더 버텨볼 힘을 주었고, 다행히 난 외면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꽃은 그 스님의 한마디였을지 모르겠다.
얼추 내가 그때 그 스님 연배가 된 것 같다. 비록 속세에 살고 있지만, 여기서라도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라도 건네며 살 수 있다면 고마울 것 같다. 누군가에게 바치는 그 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그럴 수 있다면 , 그 또한 오래도록 지지 않는 꽃이 될 것이다.
대웅전 외 다른 것은 크게 둘러볼 것이 많지 않은 단출한 절이다. 물론 대웅전과 삼세불, 꽃무늬창만으로도 그 역할은 충실하나, 탐승객의 시선으론 부족할 성도 싶다. 하지만 빈 마당을 마음에 담고, 연리근에 마음을 둔다면 이미 족할 것도 같다. 다시 봉황루 아래를 지나며, 이제 그 시절 기억도 추억으로 삼으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