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을러진 자의 변명과 소박한 계획 -
할 일이 없을 때가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이동하는 차 안에 있거나. 그럴 때는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을 들여다본다. 얼마 전에도 그리하다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대부분의 여행사진이 여름과 겨울에 찍은 것들이었다. 봄과 가을의 사진은 생각 외로 적었다. 스스로도 이상했다.
날씨가 쾌적한 봄과 가을의 정반대인 여름, 겨울에 주로 여행을 다닌 것이다. 여름엔 땀에 절어서, 겨울엔 추위에 정신 못 차리면서 말이다. 이유가 뭘까?. 문득 지난 다이어리를 들여다봤다. 4월부터 6월까지, 9월부터 11월까지. 주말마다 일정이 있었다.
먹고사는 일에 관계된 일부터 집안 대소사까지. 봄과 가을은 내게만 좋은 계절이 아니었고, 세상은 그 계절에 바삐 움직였다. 나 역시 자의 3할 정도, 타의 7할 정도의 이유로 그 움직임을 같이 했었다. 그러니 여름과 겨울에 한풀이하듯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닐까 가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러면서 자의는 몰라도 타의에서는 해방될 그날을 한층 더 갈망하게 되었고, 해방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달라져 보자는 것이 지난여름의 끝무렵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막상 가을인 10월에 들어서도 난 움직이지 않았다. 그 긴 추석 연휴에도 하루를 나가지 않았다. 이상하게 마음과 몸이 가라앉았다. 잠도 많아졌다. 여행을 위한 부지런함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물론 날씨도 도와주지 않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연휴가 끝나고 맞은 주말에도 여전했다. 마음은 더 가라앉았고 몸도 무거웠다. 심지어 어딜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 난 좋은 계절이 오면 게을러지는 체질이었다. 계절이 좋으니 집안도 쾌적하고, 그 쾌적함을 더 누리고 싶은 것인지, 잠도 늘고 식욕도 는다. 밖에 나가면 더 좋을 것을 알지만, 안에 있어도 그다지 불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휴일이면 쏟아져 나올 사람과 차들에 치이는 것을 지레 두려워한다. 그래서 결국, 지난 주말도 영원의 시간 속으로 놓쳐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 주말부터 난 달라질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5일의 연차를 한꺼번에 올렸다. 앞뒤 주말을 포함해 9일간의 휴가다. 과감히 가출을 할 예정이다. 급작스레 추워지긴 했지만, 비가 올 수도 있지만, 난 떠날 것이다. 오토바이를 몰고 저 멀리 땅끝(해남)까지 가 볼 생각이다. 그 길이 쉽진 않을 것이나, 어쩌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희망까지 품고 있다.
이젠 여행을 하며 겪는 육체적 고통을 즐기진 못하는 나이가 됐다. 그래도 잘 도닥여가며 그 길을 가봐야겠다.
한가지, 떠나기 전 사무실과 거실 화분에 물은 듬뿍 줘야 한다. 그래야 다시 돌아올 나를 반겨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