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의 미소에서 식민지의 그늘까지 -
여행의 시작을 위해 여행을 하다.
국보 서산용현리마애삼존불은 홍성에서 서산으로 넘어가는 길 옆 계곡에 있다. 삼국시대 후기, 사비성을 출발한 백제인들은 그 길을 따라 홍성을 거쳐 서산으로,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아무리 빈번한 도해(渡海)라 할지라도 결국 거친 바다를 맨몸 하나로 맞서는 일이었다. 인간의 의지로는 어쩌지 못하는 영역에서 초월자에 기대는 것은 당연했다.
태안의 마애삼존불, 예산의 사면석불이 그러했고, 이곳 용현리마애삼존불 역시 그런 간절한 기원의 소산이다. 거친 바다를 건너기 전 사람들은 의식을 치르듯 이곳을 거쳐갔을 것이다. 계곡 위 거친 돌에 현현한 보살에게 공양하고 두 손 모아 무탈함을 빌었을 것이다. 나 역시 오늘, 그러한 심정으로 서산 용현리 계곡을 찾는다.
비록 도해는 아니지만, 작은 오토바이 한 대에 몸을 싣고 제법 긴 여행을 떠난 참이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과 과천, 안양, 군포 시내를 지나는 길은 차량과 붉은 신호로 쉽지 않았다. 경기도 화성에 이르러 길은 겨우 편해졌고 평균 속도가 올라갔다. 너무 빨리 찾아온 차가운 계절 탓에, 옷깃을 헤치며 속살을 파고드는 바람은 몹시도 서슬했다. 혈관 속 피까지 차가워져 갈쯤 운산 고풍저수지를 지나 마애불이 있는 계곡으로 접어들었다.
예전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젠 너무도 유명한 관광지일 터지만, 주변 풍광은 큰 변화가 없었다. 마애불로 이어진 다리를 지나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멈췄다. 장갑을 벗고 헬맷을 벗었다. 몸을 가볍게 떨고 다리 앞에 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다리 입구 쪽에 커다란 간판이 놓여 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곧 현실이 되었다. 지난여름의 폭우로 계곡길이 많이 상해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마애불 자체가 상하진 않은 모양이다. 계곡 건너 숲 윗편으로 언뜻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마애불이 모셔진 바위리라. 잠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내 바람을 옅게 되뇌었다. 직접 뵙지 못한들 어떠한가. 어차피 마음을 전하는 것이니. 미련을 두지 않았다. 오토바이에 올라 계곡 안쪽으로 몰았다. 지근에 있는 보원사지에 멈췄다. 가을을 즐기러 온 탐방객들이 보인다. 이제 너무 자주 봐서 익숙한 절터에 더욱 익숙한 반가움의 눈길만 주고 바로 다시 떠난다. 이제 여행의 시작이다.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는다.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곧 홍성 시내 한복판을 지나간다. 옆으로 가을빛에 환한 조양문이 보였다. 옛 홍주읍성의 정문 격인 동문의 이름이다. 일제는 전국의 수많은 읍성을 파괴했다. 홍주성도 그랬다. 그래도 조양문만큼은 이곳 사람들의 노력으로 완파는 면했다고 한다.
우리네 읍성은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는다는 공동체 정신의 한 표상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읍성을 헐어버리려 했고, 사람들은 어떻게든 지켜내려 했던 것 같다. 특히 홍주성에는 구한말 항일의병의 격렬한 항쟁까지 있었다. 일제는 집요했을 것이고, 홍성 사람들의 노력은 더욱 힘겨웠을 것이다.
머물려 하면 오래 걸릴 듯하여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 여유를 내어 찬찬히 돌아볼 곳 하나를 남기니 아쉬움보다는 설렘을 간직하고 떠난다. 어차피 지금 찾아가고 있는 곳도 또 다른 읍성이다. 남쪽으로 계속 달려 광천을 지나고 보령을 지났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뭔가 돌담 사이를 지난 것 같은데. 마주 보이는 것은 학교 건물이다. 운동장을 남쪽으로 크게 돌아 좁은 길을 계속 따라간다. 주차장이 있을 법도 한데 마땅한 곳이 없다. 곧 허물어질 듯한 돌담 사이를 다시 지났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는 진즉 멈췄다.
어디가 읍성이란 말인가? 좁은 농로 한편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아뿔싸. 지금 지나온 두 곳의 돌담 사이가 각각 동문지와 서문지였다. 복원된 성문도 없고, 변변한 주차장도 없으니 도착했어도 도착한 인식을 못했다. 지도를 확대해 보니 학교 뒤편 북쪽 성벽에 관아 건물이 몇 보였다. 학교를 다시 돌아 얼마쯤 가니 고식의 2층 문루가 보였다. 그 앞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남포읍성은 고려 말 처음 쌓이고, 세종과 문종 대에 완성된 곳이다. 다른 대부분의 읍성과 마찬가지로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축성이었다. 돌로 된 석성으로, 동서남쪽으로 옹성을 두른 성문을 두었고, 치 같은 방어시설은 물론, 성 밖으로 해자까지 두른 견실한 성이었다. 산이나 구릉에 의지하지 않은 평지성이다. 성의 모양도 사각을 띠고 있어 이색적이다.
정비된 듯 정비되지 않은 북쪽 성벽에 당시 관청 건물이 바싹 붙어 있다. 정문 격인 2층의 진서루, 중문 격인 내삼문(옥산아문), 중심 건물이었을 외동헌까지 총 세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강력한 유교적 중앙집권 질서하에 각 지방의 관청들은 거의 같은 모습을 띠었고, 그 정문의 이름마저도 진서루니 진남루니 했다. 질서를 위한 것이겠으나, 그때부터도 이 땅의 사람들은 극단의 효율성을 추구했던 것이 아닌가 혼자 빙그레 할 뿐이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남아 있는 것이 어딘가 늘 고마울 따름이다.
바로 연이어 이어진 북쪽 성벽에 올랐다. 성 안쪽으로는 완만히 경사진 흙더미지만, 밖은 직각으로 내려앉은 돌벽이다. 아래를 보니 아찔하다. 밖에서 볼 때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데, 실제 방어에는 충분한 높이겠구나 싶다. 국가 단위의 대규모 침략을 막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이나, 읍성은 원래 왜구 방어가 주목적이었다. 수십에서 수백 단위로 노략질하러 들어온 그놈들을 막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성(城) 자체가 유명 관광지인 경우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옆 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오사카성이니 히메지성이니 하는 겉보기에도 '성'다워 보이는 곳이 많은데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한 성이라고 해서 가봐야 그렇게 높지도 않은 돌담이 단조롭게 빙 둘러 있을 뿐이고, 운이 좋으면 성문까지는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심지어 최근에 복원한 건물 몇 동이 전부니 그럴 법도 하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보던 뾰족하게 솟은 유럽 중세 시대 첨탑이 우리 성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유럽이나 일본의 성은 오로지, 성의 지배자 영주를 위한 시설이었다. 백성은 물론 자기 부하들까지 모조리 죽어도 영주 자신만 살아남으면 되었고, 또 평상시에는 백성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 유럽과 일본의 성이었다. 하지만 우리네 성은 백성 모두 같이 살기 위해 지은 시설이다. 전쟁이 나면 민, 관, 군이 모두 성안으로 들어 총력으로 대항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작은 땅조차 우리 것으로 지켜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아무리 보잘것없는 곳이라도 읍성이나 그 흔적을 만나면 너무도 반갑다. 일제에 의해 훼철된 우리네 읍성들이 가능한 많이 복원됐으면 좋겠다.
비로소 보다, 오래된 기억 속의 그 탑을
네비게이션을 다시 켜고 군산까지 경로를 검색한다. 내륙을 돌아가는 길과 가급적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길을 알려준다. 당연한 듯 두 번째로 경로를 지정했다. 그렇게 달리면 보이진 않겠지만 바다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부모님과 몇몇 형제들의 고향인 충남 서천도 지나게 된다. 도중, 멈추지 않을 생각이나 지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릴 듯한 느낌이다.
아직도 찬 바람에 웅크리며 달렸다. 문득 21번 국도라는 표지가 보였다. 홀수니까 이 길은 남과 북을 종으로 잇는 길이겠구나. 시작과 끝은 어딜까하고 하릴없는 상념에 잠기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길 오른쪽으로 탑 한기가 눈에 들어왔다. 키가 꽤 크다. 급하게 안내판을 본다. '서천성북리오층석탑', 일명 '비인 5층석탑'이다. 아. 여기구나. 가던 길을 백여 미터쯤 돌려 잘 정돈된 부지 내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언제부터인가 백제 탑을 설명하는 텍스트에는 미륵사지석탑, 정립사지5층석탑과 함께 비인5층석탑의 사진이 함께 있곤 했다. 사진 속 탑은 정립사지탑을 닮긴 했으나 뭔가 빈약했다. 그리고 왜소해 보였다. 사진으로 가늠할 때는 커봐야 1.5미터도 안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텍스트에는 백제탑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지방 호족이 건립한 탑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다만, 비인(서천)이라는 지명과, 항상 아련한 백제의 이름이 겹쳐 있었기에 내 기억 속에 남은 지 오래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난 정말 몰랐다. 비인5층석탑은 그저 그런 탑이 아니었다. 왜소하기는커녕 그 규모가 압도적이다. 정림사지탑을 계승했음을 대변하듯 몸돌은 가구식으로 짜였다. 특히 유난히 얇은 지붕돌은 그 끝 모서리를 살짝 공글려 도톰하게 뽑아내었다. 영락없는 백제탑이다. 비록 체적이 충실하지 않은 몸돌이나, 급격히 줄어드는 층간 높이의 어색함을 보면 감히 모범에 비견한다고 하긴 어렵겠다. 그러나, 비교적 밝은 계열의 돌을 사용해 우선 시각적으로 편하고, 부담 없이 좁아드는 비례감은 굳이 더할 필요가 없는 듯도 보인다. 기왕 망한 나라여도 그 백성은 살아남아 수백 년을 기억하고 있었음이 놀라울 뿐이다.
우연일 수 있는데, 오늘 이 길이 아니었으면 어쩌면 영원히 머릿속에만 머물 그 탑을 오늘 비로소 보았다. 앞으로도 이렇듯 계속 보아 가야겠구나를 다짐한다. 비인 5층 석탑은 지금 보물로 지정돼 있다.
완벽한 보존과 뒤틀려가는 나의 마음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 군산으로 가는 길은 서천을 지나긴 했지만, 기대했던 하구둑길은 지나지 않았다. 웬만하면 네비게이션을 따라가기로 했기에 미련은 두지 않았다. 너른 금강을 가로지르는 동백대교를 건너 왼편으로 몇 블록인가 옛 군산 시가지와 겹친다. 개항 후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곳답게 그 시절을 상기시키는 흔적 몇 곳이 명징하게 남아 있다.
근대 국가로 서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 중 하나였던 옛 세관 건물이 보였다. 핏빛 적벽돌로 쌓은 단층 건물이다. 양철 지붕의 날카로운 각도와 어울려 강렬하나 단아한 인상이다. 구한말 그 어려운 시기, 우리 조상들은 아주 드물지만 이런 멋들어진 건물을 몇 채 세웠다. 서양식으로 그리 짓는 것이 마치 우리의 국력이 저절로 신장시키고 독립을 담보해 줄 듯이 그러했던 것 같다. 어쨌건 우리 것이라 맘이 더 가면서도 한편으론 쓸쓸한 기분을 어쩌지 못한다.
연이어 옛 일본 18 은행 건물, 조선은행 건물 등이 길가에 서 있다. 해방 후 몇 번의 부침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옛 모습으로 복원되어 역사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으로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빼지 않고 모두 둘러본다. 간결하면서도 튼실한 옛 건물의 특색은 여전했다. 백 년을 지나 이백 년 이상도 버틸 기세다. 보존해 둔 옛 기둥에는 건축 당시 덧댄 판자의 자국까지 남아 있다. 그 판자들을 잇고 콘크리트를 다져넣었을, 시꺼멓게 그을린 당시 노동자의 팔뚝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 시절 군산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살았을 것이다. 군인으로, 경찰로, 은행원으로, 각종 기관 종사자로, 때론 어마어마한 대지주로 그들은 살았다. 조선이, 군산이 그리고 넓은 호남평야가 그들의 땅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고 당연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을 이루었고, 이 땅에 영속할 으리으리하고 단단한 집을 지었으며, 일본에서 들여온 고급 자재로 절을 짓고 종을 만들어 달았다.
그렇게 남아 있는 것이 신흥동 일본식 가옥 일명 '히로쓰 가옥'이고, 일본 조동종 계열의 사찰이었던 동국사다. 근처 호텔에 여장을 풀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곳으로 갔다.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이라지만, 한국식 온돌도 적용하고 서양식 콘크리트 건물도 융합시킨 건물이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내부는 볼 수 없으나, 외관에서 풍겨 나오는 그 모든 것들은 '일본식'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바로 그 건물이다. 얇은 유리창 너머 어둡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내부를 들여다본다. 특유의 다다미 방도 보이고 널찍한 복도도 보인다. 바로 어제인 것처럼 상한 곳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기모노 혹은 일본식 서양옷을 입은 누군가가 앉아 있고 서 있는 듯도 했다. 저들이 이곳에서 꾸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대지주 혹은 대자본가가 지은 건물로 알려진 이곳이다. 그들은 대를 이어 이곳에서 그들의 부와 권력이 영원할 것임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안채와 면해 있는 정원으로 눈을 돌렸다. 작은 침엽수가 심어져 있고 연못도 있으며 석등도 있는 것 같다. 이끼도 진해 녹색 일색인 그 정원. 하지만 이런 정원을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녹색이 짙어 너무 질척이는 듯하고, 모기가 참 많이 끓겠다는 생각뿐이다. 따뜻한 봄날 마른 이파리들이 성긴 흙과 화초들 사이를 굴러다니는 우리네 마당하고 사뭇 다르다. 원래 자기들 것이 아니었음에도 마치 자기들 것을 강제로 빼앗긴 양하며 이 땅을 떠났을 해방정국의 그들이 도로 튀어나올 듯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원래 이름은 금강사였다고 한다. 지금은 조계종의 절이 된 동국사. 몇 년 전인가 일본 조동종 스님이 찾아와 참회의 마음을 전하고 갔다는 이곳. 그만큼 그 모습이 뚜렷하다. 커다란 금당과 부속건물이 좁은 통로로 이어진 일본식 사찰의 모습. 건물 내부는 몇 간씩 앞으로 뒤로, 옆으로 구분된 꽤 넓은 면적을 갖는다. 따라서 금당의 지붕은 그 넓은 면적을 감당하느라 홀로 높고 가파르다. 같은 동양식 기와를 이고, 목조로 지어진 건물이라도 우리 것과는 많이 다르다. 기둥과 보 하나도 휘어짐이나 뒤틀림 없이 반듯반듯하다. 주 재료인 삼나무의 특징이다.
원래부터 단청을 하지 않아 단조로운 짙은 고동색의 저 색채. 일본 교토에서 보았던 이미지다. 참 잘 지어진 건물이다. 그리고 잘 이렇게 남아있다. 건물에 얼마나 공을 들였으면 백 년이 지나서도 바로 어제와 같을까. 물론 보수야 이뤄졌겠지만, 내부까지 원형이 이리 잘 남아 있는 곳은 드문 것 같다.
절 마당 한쪽에 생경한 종루가 서 있다. 우리네 범종은 지면에 거의 닿게 걸어서 치지만, 일본의 종은 여기처럼 종각 천장에 매달아 소리를 울린다. 아직 저 종 치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해 우리 범종과 어떻게 다른 지 모르겠다. 비슷하면서도 많이도 다른 게 우리와 일본이라서 참 신기하다.
종각을 빙 둘러 판상의 화강암 조각들이 열 지어 놓여 있다. 그 시절 조성된 석조 33 관세음보살상이라 한다. 표면은 많이 마모돼, 알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난 여기서도 뭔가 다름을 느낀다. 일본의 중세 이후 조각을 보고 있으면 살짝 거부감이 든다. 기본적으론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무언가 다르다. 같은 화강암에 정으로 쪼아 만든 것인데, 대체 무엇일까.
미소가 없다.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미소다. 우리에겐 깨지고 파인 석상이라도 그 얼굴엔 미소가 보이는데, 일본은 미소가 없다. 난 한 번도 미소를 느껴본 적이 없다. 내 마음이 너무 뒤틀리고 있다. 마음을 풀어야겠다.
거리를 걸었다. 적당한 저녁식사 장소를 물색하며 길을 따라 걸었다. 직진도 해 보고 좌회전, 우회전도 해 본다. 미안하지만 첨단을 가고 있는 도시는 아닌 듯, 여기저기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도 보인다. 외지인에겐 푸근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 한편에 마치 일제강점기 일본인 동네 한 꼭지를 가져다 놓은 듯 일군의 목조 건물을 만났다. 처음엔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었나 했지만, 안내판에는 '군산 근대역사 체험공간'이라 쓰여 있다. 새로 조성한 곳이다. 안내문 말미에 이렇게 써 두었다.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닌 우리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좋은 말이다.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미 사라진 그 시절의 흔적을 이렇게 큰돈 들여 복원해 놓고 역사 체험공원이라 해 놓은 이유가 알고 싶다. 그 건물들 안은 카페나 식당 등 상업용도로 쓰이는 것 같은데,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식사를 하며 뭘 체험하고 뭘 느끼라는 것인지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다.
진한 우족탕 한 그릇이 몸과 마음을 풀어준다. 가게 주인에게 '잘 먹었습니다.' 하고 가게를 나왔다. 어둠이 깔리는 시내 저편에 기름 냄새 섞인 비릿한 항구의 정취가 코끝에 느껴지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