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거장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함께 음반을 녹음하기는 했으나 음악적인 관점에서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히테르는 당대 최고의 연주자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연주했던 <베토벤 삼중 협주곡>을 자신의 회고록에서 매우 격앙된 어조로 비판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카라얀은 이 작품을 명백히 잘못된 방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자신을 높이기 위한 거드름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협연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음원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주 중 하나로 남아있으며 빈심포니와 함께 했다는 점 또한 무척 특별하다. 연주를 들어보면 비록 서로가 추구하는 방향성은 다르지만 결국 최선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대승적 합의를 이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서로를 격렬하게 부정하지만 이 때문에 이토록 맹렬하고 전투적인 음원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음악이란 예술은 참으로 오묘한 영역이다. 바로 이런 점을 리히테르와 카라얀은 교묘한 작용 반작용으로 활용해 논란의 명반을 세상에 남기게 된 것이다.
크리스티안 페라스의 바이올린은 애절하게 울부짖는다. 그만의 진한 울림은 가히 독보적이나 정경화의 최전성기 시절 들려주던 강인하고 깊은 보잉과 묘하게 맞닿는다. 그래서 그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정경화와 샤를르 뒤트와의 연주를 본능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주제부 독주에선 일반적인 연주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한 옥타브 높은 고음 변형을 구사하며 1악장 '카덴차'에서는 이상적인 선율들을 절묘하게 삽입했다. 날렵하게 칼날을 휘두르는 '바이올린 제일검'의 놀라운 솜씨는 휘몰아치는 격한 감정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게 한다. 상대의 목숨을 거두는 전설의 검객, 크리스티안 페라스의 보잉은 그저 탄복할 수밖에 없는 테크닉과 소릿결로 듣는 이의 가슴 속에 깊고 뜨거운 전율을 안긴다.
그가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보여준 살갗을 스치는 짜릿한 연주는 베토벤이나 브람스에서 보여주던 소리와 비교해도 결이 다른 울림이다. 차이콥스키 역시 시벨리우스와 동일 선상에서 북유럽과 러시아의 드넓고 차가운 숨결을 고스란히 담아낸 명연주이다. 리히테르와 달리 페라스는 카라얀과 강한 화학반응을 이룬다. 분명 그 두 거장은 서로를 운명적인 만남으로 여겼을 것이다. 불협화음의 대척점도, 강렬하게 용해되는 어울림도 모두 격한 감정의 폭풍을 선사한다. 매 순간 장쾌하고 또렷한 거침없는 페라스의 보잉은 차이콥스키의 이상향에 가장 근접한 천상의 경험을 안겨줄 것이다. 당신도 그 놀라운 환희를 온몸으로 만끽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