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크너 교향곡 5번> 디스코그라피 중 단연 최고의 호연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프란츠 벨저-뫼스트와 런던필하모닉의 1993년 빈 실황을 선택할 것이다. 작품 전체를 완벽히 이해한 지휘자와 과감하고 의욕적인 오케스트라, 이들 연주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최상의 완성도를 구현한다. 실연에서 이토록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행여 만난다 해도 이들이 보여준 수준에 이르긴 힘들 것이다. 어느 부분 하나 주저함을 찾을 수 없는 강력하면서 일사불란한 앙상블과 일관된 흐름은 기능적, 예술적 완성도에 있어 최상의 명연이라 자부한다.
1악장 도입부터 강렬하게 뿜어내는 유려한 고음현의 질감은 최고의 경지이다. 과거 텐슈테트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세련된 강렬함이 70분 동안 지속되는 마법은 압도적인 긴장과 쾌감을 안긴다. 터질 듯한 팀파니의 폭발적 타격, 금관군의 깨끗하고 시원스러운 융단 폭격, 저음현의 굵고 진한 질감, 깔끔한 목관이 전하는 천상의 음색, 고혹적인 공간적 음향까지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복합적 감동을 선사한다. 2악장 '아다지오'는 현의 깊고 매혹적인 질감에 벅찬 환희를 담아낸다. 이는 지휘자와 단원들 모두 혼연일체로 빚어낸 비현실적 화학반응의 전형이다. 그저 감탄스러운 장엄한 화음이 온몸에 스미는 경험은 브루크너에 대한 새삼스런 존경과 함께, 악보 위의 음표들이 현실 세계에 낱낱이 구현되는 소름 돋는 순간이라 하겠다. 3악장 '스케르초' 도입엔 폭발적인 스퍼트를 가동한다. 이들은 잠시 쉬어갈 때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응축된 힘은 거칠게 달리는 총주에 오롯이 쏟아낸다. 살아 숨 쉬는 듯한 질감과 일관된 텐션 위로 꿈틀거리는 폭발력은 교향곡 속에 내재된 생동감의 절대치를 구현한다. 이어 4악장 '피날레'는 지금까지 보여준 전지전능의 순간들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주제부 총주는 가히 충격적이다. 이 열혈 전사들이 긴 시간 지치지 않고 달려온 여정의 종착점, 그 마지막에 도래하면 충격은 물론, 공포심마저 안기는 폭발적 코다가 빅뱅의 순간처럼 통렬한 쾌감을 시각화한다. 천상에서 이를 지켜보며 환하게 미소 지을 브루크너의 모습이 자연스레 오버랩되면서 청중들의 박수와 갈채가 쏟아진다. 치열하면서 냉혹한 여정은 폭풍처럼 끝나지만 강렬한 여운은 여전히 가슴 한 구석을 지배한다. 이들의 연주가 기록돼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깊은 위안과 감사를 느낀다. 그 어떠한 찬사도 모자랄 만큼 최고의 음원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