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 게르기예프, 키로프 오케스트라의 <림스키-코르사코프 "셰헤라자데">는 러시아의 기운을 가득 담아 고혹적 세련미와 강한 힘을 더해 황홀한 연주를 선사한다. 이 연주를 듣노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름다운 거리를 마음껏 걸었던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 마음 한편이 한껏 아련해지는 듯하다. 마냥 야성적인 질감만이 아닌 고운 여인의 자태를 바라보듯 떨리는 마음으로 보잉 하는 고음 현의 풍성한 소릿결은 가슴이 시리다 못해 아려온다. 3악장, '젊은 왕자와 젊은 공주'의 사랑스러운 선율은 본능적으로 정신이 몽롱해지는 듯하다. 악장 세르게이 레비틴의 바이올린 솔로는 러시안적인 색채를 현 위에 담아내 강렬하고 신비롭게 연주한다. 4악장, 피날레는 다른 연주들과 완벽히 비교되는 게르기예프-마린스키 특유의 야성미와 작품 본연의 질감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뜨겁게 산화한다. 무엇보다 코다의 깊고 진한 아련함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보로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곡이다. 러시아를 직접 경험한 이라면 거리엔 중앙아시아인의 비율이 제법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동유럽에서 극동아시아에 이르는 드넓은 영토에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그만큼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는 지극히 친숙한 지역이자 당연한 일상을 의미한다. 보로딘 작풍 특유의 낭만적인 선율미는 '중앙아시아의 자연'을 묘사했다기보다는 러시아인이 바라보는 푸른 초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다. 이들의 연주는 바로 그런 관점에서 원곡의 느낌을 진정 제대로 살린 훌륭한 앙상블을 들려준다.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 역시 그런 관점에서 러시아풍의 심상을 음악에 담아낸 작품이다. 발라키레프는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제정 러시아의 작곡가 모임 "러시아 5인조" (림스키-코르사코프, 무소륵스키, 보로딘, 큐이, 발라키레프) 중에서도 세자르 큐이와 더불어 가장 덜 알려진 작곡가이지만 이 작품은 우리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작품이다. <셰헤라자데>가 그렇듯, 이 곡은 이슬람 세계의 신비로운 느낌을 작품 곳곳에 심어놓아 이국적인 분위기와 경쾌함으로 가득 차있다. 게르기예프 지휘 성향에 딱 맞아떨어지는 작풍도 그렇고 키로프 오케스트라가 지닌 특유의 스피디하고 시원스러운 앙상블 또한 긴 여운과 함께 독특한 감칠맛을 안겨준다.
연주를 듣는 동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가슴 떨린 시간을 상기하며 비록 짧았던 일정이었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되는 그날의 모든 순간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나의 마음을 한없이 적셔온다. 이들의 음악을 통해 러시아적 감성에 빠져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당신도 오롯이 만끽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