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는 깊고 진지하거나, 반대로 가볍고 장난스러운 극단적 성향을 지닌다. 강하고 테크닉적인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와 발레리 게르기예프,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분명하게 후자에 속한다. 부정적으로 볼 여지도 많겠지만 이토록 무거운 작품을 간결하고 부담스럽지 않게 연주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이다. 이는 러시안 연주자들만 가능한 놀라운 재능이기도 하다. 쉽게 연주한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로우며 로맨틱하다는 의미와 직결된다. 그래서 이 음원은 자칫 라흐마니노프를 너무 낭만주의적인 작곡가로서 각인시킬 수 있는 위험성도 지닌다. 이 곡은 실연이나 연주 영상을 보는 입장에서도 제법 지치는데 이들의 연주는 장난스럽고 천진난만하며 지극히 재즈스럽다. 흔히 말하는, '곡을 갖고 논다'는 느낌인데, 데니스 마추예프를 직접 목격했던 오래전 경험은 당연히 그이기에 가능하다는 걸 일깨워주면서도 비현실적인 이질감이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3악장 코다의 격정적 피날레는 광기 어린 속주와 강한 자신감, 그리고 그들만의 자부심으로 융합된 환희를 선사한다.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보여주는 연주이다. 간결하고 깔끔한 터치와 감각적인 템포감, 곡 자체를 '들었다 놨다' 하는 앞선 연주와 대동소이한 여유로움은 이 작품에서 찰떡처럼 딱 맞는 궁합을 보인다. 지나치게 고전적이거나 낭만적인 해석은 이 곡이 지닌 특유의 감칠맛을 다소 경직된 패턴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추예프는 자유분방하면서도 고도의 테크닉을 겸비한 연주자이기에 라흐마니노프가 원하는 방향을 적확하게 짚어낼 수 있는 듯하다. 가장 유명한 '제18번 변주'도 낭만성과 극적 자유로움을 절묘하게 엮어낸 절충적인 연주를 선보인다. 클라이맥스로 흐르는 '제24번 변주'의 코다는 드라마틱한 속주 속에 지극히 순수한 마무리로서 깔끔하게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