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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Feb 21. 2023

반가운 '배우 개그'

모든 순간, 모든 것들이 나를 속인다고 해도

대학생 시절 영화를 찍은 적이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9명이서 십시일반으로 100만 원을 모아 찍었던, 학생 영화의 범주에 들었던 아주 작은 규모의 촬영이었다.


영화를 찍으려니 주인공을 맡을 배우가 필요했다. 배우를 어떻게 구하는지 몰랐던 우리는 무작정 배우 모집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어설픈 영화에 지원하는 사람이나 있을까 싶었지만 한 자리를 두고 100명이 넘게 몰렸다. 생각보다 뜨거운 성원(?)에 우리는 예정에도 없던 오디션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렇게 뽑힌 배우는 참 열심이었다. 친한 배우들을 조연으로 소개해주고, 사비를 들여서 촬영용 메이크업을 해오고. 비흡연자였던 배우가 흡연신을 위해 담배를 두 갑 가까이 피울 때는 많이 미안했다. 촬영이 잘 마무리된 뒤 뒤풀이 자리에서 자연스레 질문이 나왔더란다. 열심히 도와줘서 감사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었는지 묻고 싶었다. 배우는 꽤나 담담하게 답했다.


"학생 영화 사정 어려운 거 저도 알아요. 그래도 전 이렇게라도 연기할 수 있는 게 제일 좋습니다.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거 아니거든요."


배우의 세계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최근에 한 칼럼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해 영화계를 강타한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원스>의 남주 배우 '키 호이 콴'에 대한 기사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69/0000722215?sid=110


콴은 13세에 ‘인디아나 존스’(1984)에 출연하며 영화배우가 됐다. 꼬마 택시운전사 숏을 연기했다. 기지를 발휘해 주인공 존스(해리슨 포드)를 돕는 귀여운 모습으로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는 소년들의 모험을 다룬 ‘구니스’(1985)에도 출연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인디아나 존스’ 감독이자 ‘구니스’ 제작자였다. (중략) 성인이 되자 콴을 찾는 감독이나 제작자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홍콩 영화 ‘무한부활’(2002)을 끝으로 배우 이력은 중단됐다. 콴은 출연 제안이 들어오지 않아도 영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통역사나 조감독 등 스태프로 일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콴을 다시 카메라 앞으로 불러낸 영화다. 대니얼 콴 감독이 2019년 트위터에서 콴을 우연히 발견하고 출연 제안을 했다고 한다. 콴은 이후 ‘알로하! 오하나를 찾아서’(2021)에도 캐스팅됐다.


영화를 보면서 묘하게 김창완을 닮았다고(개인적인 의견) 생각한 이 아저씨에게 이런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니. 영화를 찍었을 때의 생각도 나고, 극 중 '다정함'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콴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한 칼럼이었다.


사실은 드물지 않은 '배우 개그'

사실 이런 일들이 영화나 드라마계에서 드문 건 아니다. 배우는 프리랜서고, 일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나뉘다 보니 이런 일들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반대로 다작을 하는 배우는 한 작품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였던 배우가 다른 작품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인기를 끄는 일도 종종 있다. 보통은 배우 개그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본의 국민 배우 사카이 마사토가 대표적인 예다. '당한 만큼 갚아준다'는 대사로 인기를 끌었던 전작 <한자와 나오키> 대사를 <리갈 하이>에서 '본 적 없는 사람에게도 갚아준다'로 살짝 비틀었다. 아는 사람은 다 웃었던 전형적인 배우 개그다.

한자와 나오키와 리갈 하이. 둘 다 띵작이니 꼭 보세요


쉴 새 없이 콘텐츠를 만드는 넷플릭스도 홍보 전략으로 배우 개그를 자주 쓴다. 워낙 이런저런 배우들이 다양한 작품에 나오다 보니 일부러 작중 등장하는 배우들의 다른 배역을 골라 소개하는 게 대표적이다. 넷플릭스를 자주 보는 나 역시 잘 모르던 배우가 '여기도 나왔었어?' 싶을 때 참 재밌다.


요즘은 <일타 스캔들> 홍보 차 많이 쓰는 듯 하다. (출처: 넷플릭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이런 배우 개그가 유행하는 게 참 반갑다. 재미도 재미지만, 배우들이 거쳐온 치열한 삶의 증거가 남아 보답으로 돌아오는 것 같기 때문이다.


유명한 얘기지만 배우들의 세계 역시 힘들고 치열하다. 주연은커녕 대사 한 마디라도 하는 배역을 따려면 온갖 오디션을 거쳐서 천운에 가까운 낙점을 받아야 한다. 촬영이 늦어서 기약 없이 몇 시간씩 기다리는 일은 흔하고, 힘들게 일하더라도 박봉에 가까운 급여로 사는 경우도 많다. 최근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미친 연기력을 보여준 이성민 배우가 오랫동안 생계난에 시달렸다는 건 유명한 얘기다. 어디나 그렇지만, 배우의 세계 역시 좁은 기회를 잡기 위해 수많은 능력자들이 오늘도 눈물 나게 뛰어다니는 곳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배우들이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고, 운 좋게 작은 배역이라도 잡은 배우들은 단역부터 차근차근 올라온다. 출연작이 점점 늘어나면 분량도 늘고, 위의 사진들처럼 배우가 맡았던 배역들이 모여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런 치열한 노력들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아 배우 개그를 보면 흐뭇한 마음이 든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한 세상에서, 다른 누군가라도 저렇게 노력을 인정받는 게 좋다는 생각일 것이다.




키 호이 콴에 대한 칼럼이 반가웠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콴이 기회를 잡고 성공했을 때, 아역 배우의 경력이 그가 성공하기까지의 노력의 증거로 남은 것 같아 좋다. 아역의 경험이 독자로 하여금 "그 동안은 뭘 했지?"라는 질문을 부르고, 질문의 대답으로 콴의 치열하게 노력해 왔던 스토리를 제시하는 게 좋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노력이 평가절하되는 듯한 세상.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기다려왔다는 생각이었을까. 모든 게 우리를 속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도, 그래도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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