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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an 30. 2023

<스토브리그>와 사람에 대한 예의

그리고 늦게 쓰는 2023년의 다짐


<스토브리그>는 종영한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돌려보는 드라마다. '우리는 야구를 드럽게 못해요'가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을 참 좋은 장면과 대사들이 많다... 고 말하고 싶은 나만의 최애 드라마.


이거 말고도 좋은 장면 많다구요


'야구를 드럽게 못해요' 대사의 주인공 권경민(오정세 扮)은 사실 극 중에서 빌런 포지션에 가깝다. 모기업에 돈도 안 되는 야구단을 해치워버리고 자기 실적을 쌓아야 하는 구단주 조카. 친척집에 끼어 일하는 탓에 돈은 있지만 금수저는 아닌, 묘한 포지션의 캐릭터다. 


아무튼 야구를 못한다는 명목으로 구단주 조카가 연봉 예산을 깎아버린 상황에서 주인공인 백승수 단장(남궁민 扮)은 어찌어찌 난관을 헤쳐나간다. 연봉 체계를 조정하고, 불만 있는 선수들을 하나하나 만나서 설득(때론 압박)을 하고. 보통 선수들과 싸우는 장면이 '스토브리그 명장면'으로 많이들 나오는데, 다른 부분을 얘기를 해보고 싶다.


연봉협상 에피소드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곽한영 선수(김동원 扮)는 몇 년째 연봉협상에서 인상폭이 낮아도 불만 없이 받아들이는 '착한 형'이다. 주변의 꼬드김에 이번만큼은 연봉을 높게 올려 받아야겠다고 마음먹지만, 구단 사정으로 연봉이 깎인 선수들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린다. 최종 사인 직전 구단은 연봉 2억 원 계약서를 먼저 보여주지만, 잠시 뒤 2억 5000만 원 계약서를 보면서 선택권(?)을 준다. 더 높은 연봉을 택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다른 선수들의 연봉이 깎인다는 것. 결국 '착한 형'은 구단과 다른 선수들을 위해 낮은 인상률을 감수하고 사인을 한다.


"솔직히 이렇게 하실 줄 알고 있었는데요. 이번엔 착한 형 하지 말길 바란 것도 있었어요."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마요."
"(2억 5000만 원짜리 계약서 보고) 그 계약서 제가 가져갈까요?"
"아뇨. 제가 찢어버릴게요."

https://youtu.be/WHToUk2VltE


예산 감축 속에서도 드림즈는 곽한영을 마지막으로 어찌어찌 연봉 협상을 마무리한다. 프런트 입장에선 기뻐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주인공 백승수 단장의 표현은 마냥 밝지만은 않다.


"곽한영 선수가 우릴 뭐라고 생각할까요?"
"네?"
"양아치라고 생각할 겁니다"




언론 시험을 한창 준비하던 시절,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책을 읽은 적 있다. 지금은 다른 분야로 가신, 하지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업계 대선배님이 쓴 에세이집이다. (선배님껜 죄송하게도) 책을 읽은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제목만큼은 두고두고 머릿속에 맴돌았던 기억이 있다. 사람에 대한 예의라니. 무작정적인 동정, 착함, 배려가 아닌, 그렇지만 냉정과도 거리가 있는, 무언가 프로페셔널한(?) 따뜻함으로 이해를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백 단장은 해야 할 일을 훌륭하게 처리했다. 제한된 예산 안에서 선수들의 재계약을 모두 완료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끝나도 재밌는 에피소드로 남겠지만, 착한 형 장면이 있었기에 이 드라마가, 백 단장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자신의 영역과 업무를 보호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잊지 않는 마음가짐. 무작정 착하거나 냉정하기 쉬운 사회생활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마음가짐이 아닌가... 싶다.


2년 차 기자로 접어들면서 점점 사람에 대한 예의가 중요하다는 점을 느낀다. '기자는 사람 만나는 직업'이라는 격언을 체화했던 게 1년 차의 경험이라면, 예의를 지키며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게 올해 초에 스스로에게 한 다짐이다.


내가 할 일과 영역을 지키면서, 동시에 타인의 입장과 영역도 진심으로 생각하고 배려하고 싶다. 돈이 없어 착한 선수의 호의를 이용했지만, 그 행위가 나빴다는 생각만은 가슴에 새겨두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젠가 한 번은 얘기하고 싶었던 장면인데, 1월이 다 가고 나서야 새해 다짐으로 소개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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