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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May 13. 2021

신사임당과 한국 사회

화폐 모델은 어떤 것들을 보여주는가

이번 한겨레교육 온라인 백일장 작문 주제는 5만 원짜리 그림이었다. 수상평에 언급된 것처럼, 보다 창의적인 소재의 글들을 보려던 시도로 생각했다. 운이 좋아 수상을 했는데, 기념 삼아 남겨보는 글:)

 



신사임당의 본명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이다. 아직까지도 사임당의 이름에 관련해서 명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지폐 속 인물 중 유일하게 본명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화폐 속 인물은 해당 국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건국의 아버지들과 링컨이 들어간 미국 달러는 미합중국과 연방의 통합을, 근대화의 영웅들이 들어간 일본 엔은 근대화와 조국의 부국강병을, 마오쩌둥이 유일한 모델인 중국 위안은 사회주의 혁명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정당성을 가치를 중심에 두는 셈이다.

미국 달러, 일본 엔, 중국 위안(출처: 위키피디아)


동시에 화폐 속 인물들은 그 사회가 외면하는 가치를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앤드루 잭슨이 미 달러의 모델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미국 사회가 얼마나 인종차별에 무감각해왔는지 알 수 있다. 정한론을 주장한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려진 엔화를 보면 일본의 과거사 인식이 여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독재자이자 학살자였던 마오쩌둥은 말할 필요도 없다. 화폐 모델은 한 사회의 가치 주소를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지표인 셈이다.


신사임당은 어떨까. 인지도 있는 위인임에 틀림없지만, 다른 화폐 모델들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꾸준히 들어왔다. 여성 위인을 선정해야 한다는 제정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유관순이나 허난설헌 같은 다른 여성 위인들에 비해 아쉽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현모양처라는 사임당의 기존 이미지가 모델 선정 당시인 2009년 우리 사회가 중시하던 가치와 부합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여성 위인이 어머니의 이미지라는 점은, 바꿔 말하면 그만큼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적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유교적 현모양처로 유명하지만, 그녀의 예술가적 면모는 여전히 현모양처 이미지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명 양반 집안 출신임에도 정확한 성명도 모른다. 여자의 이름을 중시하지 않던 가부장 사회의 폐단 때문이다. 시대의 희생자이기도 했던 그가 시대의 가치를 잘 구현했다는 점에서 화폐 모델로까지 선정된 점은 아이러니하다. 유교 가부장제를 비판해오면서도 5만원권엔 여전히 ‘피해자 사임당’이 들어가 있는 상황은 우리 사회가 어떤 점들에서 소홀해왔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영국 정부는 앨런 튜링을 새 50 파운드 지폐의 모델로 확정했다. 2021년 6월 23일부터 발행될 예정이다.(출처: BBC) 

다행히도 세상은 바뀌고 있다. 트럼프 시기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미국은 앤드루 잭슨이던 20달러의 모델을 흑인 여성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영국 역시 새로운 50파운드의 모델을 컴퓨터의 아버지이자 동성애자였던 앨런 튜링으로 교체하며 동성애 탄압으로 튜링을 죽음으로 몰아간 자신들의 과오를 고쳐나가고 있다. 우리 사회 역시 피해자-위인을 만들던 2009년에 비해 진보된 의식을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이름 없는 사임당이 더는 없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할 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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