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했다. 모 언론사에서 일하는 스터디 때 지인분이 'MZ 세대'라는 걸 주제로 기획 기사를 쓰고 싶으시다고 해서, 재미있겠다 싶어 인터뷰에 응했다. 지인도, 나도 모두 언론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MZ세대' 내지 '밀레니얼 세대'의 일부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인터뷰는 재미있었다. 인터뷰 반, 생각 교환 반의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 나도 모르게 그런 얘기를 했다.
"세대 구분은 많은데, MZ 세대 분석이라고 나오는 기사들을 보면 그저 '어린 시절부터 경쟁 환경에 노출' 정도로만 언급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안타까워요. 그 세대만의 문화도 얘기하면 좋을 것 같은데. 가령, 넥슨 게임이나 싸이월드 없이 우리 세대를 얘기할 수 있나요? 00님(스터디원)도 넥슨 게임 많이 하셨잖아요."
바람이나 크아 안해본 MZ 세대 없제?
그래 넥슨 게임.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넥슨을 가지고 우리 세대를 분석한 기사를 본 적은 없는 것 같다(싸이는 부활 이슈가 있어서 몇 번은 본 기억이 난다). 세대의 일원으로서 불만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확률 조작이니 뭐니 해서 많이 망가졌지만, 적어도 90년대 생이 학창 시절을 보낸 2000년대의 넥슨 게임은 그 세대에겐 하나의 사회현상이고, 일종의 집단 기억이었다. 지금 당장 '응답하라 2006' 같은 게 만들어진다 하면 가장 1순위로 나와야 할 문화적 공감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니. 90년대 생으로서도, 언론인 지망생으로서도 아쉽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 아쉬움에서 이런 얘기를 한 것 같다. 다행히 인터뷰어도 공감을 해주는 것 같다. 기사는 다음 주에 쓰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 얘기도 나오면 좋을 텐데. 잘 나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2000년대를 잡고 있는 2020년 사람들
이쯤에서 뜬금없어 보이지만 영화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사실 이 글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2021년이 5개월 지난 이 시점, 올해 봤던 영화 중 아직까진 가장 인상적인 영환데, 리뷰 하나 없이 넘어가는 것도 아쉬운 것 같아 의무감에서라도 쓰는 리뷰.
B급 감성 넘치는 포스터도 좋다(출처: 다음 영화)
과거 국내 최대 이용자 수를 자랑했던 클래식 RPG 게임 '일랜시아' 현재는 운영진에 버림받은 대한민국 대표 망겜! 감독은 매크로와 해킹이 난무하는 무법천지 게임 세계에 여전히 남아있는 유저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일랜시아 왜 하세요?” (출처: 네이버 영화 소개)
흔히들 넥슨 5대 클래식으로 바람의 나라, 어둠의 전설, 아스가르드, 테일즈위버, 그리고 일랜시아를 꼽는다. 바람이야 넥슨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고, 테일즈위버도 아직까지 나름 인기를 끌고 있지만, 나머지들은 그런 것도 없다.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에 나온 이 게임들은 이제 너무 발전해버린 다른 게임들과 고인물들에 치여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다.
영화학도이기도 한 감독은 이미 '망겜'이 된 지 오래인 일랜시아의 20년 차 고인물이다. 화려한 전성기를 진작에 지나온 일랜시아는 이제 운영진에게도 버림받은 게임이다. 평상시라면 제재를 받았을 매크로가 판치고, 어떤 유저들은 아예 매크로를 직접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이벤트는커녕 패치도 거의 몇 년째 멈춰버린 진짜배기 망겜이지만, 여전히 이 세계에는 사람들이 남아있다. 이 오래되고 허접한 게임에 왜 남아있는 건지, 영화는 감독의 질문에서 시작한다. "일랜시아 왜 하세요?"
이겜 왜 함?
게임 내 길마(길드장)이기도 한 감독은 친한 길드원들을 직접 만나며 답을 찾아나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딱히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일랜시아를 붙잡고 있는 건 아니다. 그냥 해왔던 것이 편하고, 만나왔던 사람들이 여기 있고, 편하고 좋은 사람들과 세계를 쉽사리 떠나는 것이 싫다는 사람들이다. 20년 된 그래픽 때문에 캐릭터 외형도, 제스쳐도 한정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 간단한 표정과 행동만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타인과 공유하며 즐거워한다. 캐릭터들끼리 모여서 행사도 열고, 채팅으로 다 같이 노래도 부른다. 나를 포함해 온라인 공간에서 친밀감을 느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야기이다. 영화 후반부에 길드원들이 현실 세계에 모여 1박 2일 MT를 떠나는 장면을 보면, 이런게 넥슨 게임과 2000년대를 살아온 90년대만이 할 수 있는 유대감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시간이 흘러 2020년이 됐고, 학생이던 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버렸지만 그 유대감 때문에 2000년대를 놓지 못하고 있다.
망겜유저도 사람이야!
몇몇 리뷰를 찾아보니, 공정의 시각으로 영화를 해석하는 글들도 있었다. 망가지는 게임을 위해 넥슨에 성토하는 유저들의 움직임을 '게임 속에서라도 공정한 사회를 바라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인데, 개인적으로 공감이 되진 않았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의 장면들은 그렇게까지 깊이 파고들지 않는 느낌이고, 매크로가 난무하는 게임에서 공정이라는 걸 찾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든다. 공정도 한 축이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게 메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다만 연대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운영자가 게임을 버린 사이 유저들은 알아서 게임 속 세상을 유지해오고 있었지만, 어느 날 접촉한 계정을 강제 접속종료 시켜버리는 버그 캐릭터가 등장해 게임 사회를 어지럽힌다. 감독을 비롯한 유저들은 넥슨에 성토하지만 운영팀은 묵묵부담으로 일관하고, 결국 몇몇 유저들이 팀을 이뤄 본사에 직접 찾아간다. 본사에게서 버그 해결에 대한 답변을 얻어내고, 실제로 몇 년만의 패치로 버그가 잡혔을 때의 효능감은 연대에서 나오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아무리 망해도 내 게임이고, 내 사람들이고, 그렇기에 서비스 종료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유저들은 말한다. 그 희망사항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모이게 만든 게임을 스스로 지켜나가는 모습은 MZ 세대만의 특이한 연대일지도 모른다.
나도 청년인 입장에서, 이 영화가 '청년 세대의 현실을 보여준다'라고 스스로 말하기엔 민망스러운 부분은 있는 것 같다. 다만 일랜시아 속 사람들을 만나며 우리 사회의 모습이 보였다는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서 게임 속 이야기도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지 않나 싶은 생각은 들었다. 그 매개가 게임이라는 것이 MZ 세대만의 특징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흥미로운 영화였다. 오늘도 사람들은 일랜시아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