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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un 12. 2021

다시 보니 될 것 같다

안 될 이유와 될 이유

작년 어느 때. 친구와 함께 같은 방송사를 썼을 때의 일이다. 나보다 더 오랜 기간 준비해왔던 친구는 많이 불안해했다. 자신의 자소서가 부족하진 않을까 걱정을 했고, 제출 이후에도 괜히 찝찝하다고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자소서를 준비하는 동안 서로 첨삭을 해줬던 덕에 친구도, 나도 서로의 자소서 내용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부족해 보이는 부분도 느껴졌고, 자잘한 부분에서 아쉬운 문장이나 구성도 보였다. 하지만 내 자소서도 그렇게 썩 만족스러웠던 상황은 아니었고 해서 일단은 기다려보자며 위로했던 기억이 있다.


그해 나는 서류전형에서 탈락했지만, 친구는 서류 합격을 넘어 해당 방송국에 최종 합격했다. 축하를 뒤로하고 다음 기회를 절치부심하는 사이 해당 방송국은 얼마 전 또다시 공고를 냈다. 작년과 문항이 거의 비슷했고, 자연스레 작년에 합격한 친구의 자소서를 다시 읽어봤다. 재밌는 것은, 작년에는 부족한 점이 먼저 보였던 자소서가 이번에는 좋은 점만 먼저 보였다는 점이다. 어느 부분에서는 '이래서 붙었구나'라는 생각도 들고, 전체적인 구조도 다시 보니 치밀하게 짜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합격자 프리미엄을 가지고 보는 건 아닌가 생각도 해봤지만, 잘 쓴 부분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긴 어려웠다. 친구 자소서에서 좋은 부분을 익히며 다시 자소서를 썼고, 처음으로 해당 방송국의 서류를 통과했다.


자소서가 자체가 바뀐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은 친구의 합격여부뿐이다. 합격 전에는 부족해 보였던 자소서가 '합격 자소서'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니 빛나 보이는 상황이 스스로 재밌다고 느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는데, 그 간사함이 나를 속이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홀랑 넘어가버렸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내 시야라는 게 때론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그 묘한 기분 속에서 뜬금없게도 브레이브걸스 생각이 났다.


기적 같은 역주행을 넘어 대세 걸그룹이 된 브레이브걸스. 일반적인 아이돌판의 트렌드로 볼 때 사실 브레이브걸스는 '안 될 이유'가 더 많은 아이돌이다. 2016년 데뷔 당시 20대 중반에 달하는 (아이돌로선) 높은 연령, 스타 작곡가가 세웠다지만 프로듀싱에는 소질이 없는 중소형 소속사,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신인이 쏟아져 나오는 아이돌판의 과도한 경쟁 등 안 될 이유만 보면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상황 속에서 7명으로 시작한 팀이 하나둘씩 줄어들며 4명까지 남았을 때, 올해 들어 해체를 본격적으로 준비할 때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한 멤버는 '우리는 뭘 해도 안 돼'라고 생각했다는데, 그 심정을 아직도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들이 뜨고 난 뒤 이 모든 이유들은 '될 이유'로 탈바꿈했다. 점점 어려지는 K팝 걸그룹 시장에서 20대 중후반의 연령대는 되레 독특하게 다가왔다. 스타 작곡가 출신 대표 덕에 적어도 곡만큼은 좋은 곡들을 받을 수 있었고, 돈 때문에 수많은 그룹이 사라지는 아이돌판에서 대표 저작권 수입 덕분에 해체하지 않고 5년 넘게 팀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 사이 쌓아뒀던 좋은 곡들과 뛰어난 실력, 성숙한 인격은 역주행 이후 브레이브걸스의 인기를 견인했다. 이제 와서 보니 '될 이유' 투성이다.

브레이브걸스엔 '될 이유'가 충분히 많았다


최근 두 언론사의 필기를 연달아서 탈락했다. 하나는 작년에 필기를 붙었던 곳이라 나름 자신감 있게 쳤던 곳이고, 나머지 한 곳은 꽤 가고 싶은 곳이라 기합을 넣고 시험을 봤던 곳이었다. 그동안은 필기 합격률이 좋아서 내심 하나쯤은 붙겠지 하고 있었는데, 둘 다 떨어지니까 꽤나 마음이 아팠다. 


나 역시도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안 될 이유'를 나도 모르게 돌아보게 된다. 초년차 때는 괜히 보면 재수 없다면서 무시하던 내 약점도 눈에 밟히고, 하나 둘 늘어나는 나이는 '올해는 꼭 되어야 하는데'라는 조급함으로 돌아온다. 예전에는 떨어져도 다음이 있겠거니 하고 훌훌 털고 넘겼는데, 연차가 쌓이면서 '이제 다음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탈락 하나의 쓰라림이 점점 커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두 번째 필기에서 떨어졌을 땐 이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힘이 빠졌다.


그래도 배운 것이 있다면, 이 상황 역시 내 상황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언젠간 일이 잘 풀려 이때를 돌아봤을 때, 나는 잘 될 이유들을 가지고도 상황에 속아 되지 않을 이유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친구는 3년이 조금 넘는 기한 동안 준비했다. 브레이브걸스는 5년이다. 연차로 따지려는 건 아니지만, 그 기간 동안 안 되는 이유만 생각했으면 성취는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결국 지금 할 수 있는 건 준비하는 것뿐이다. 상황에 굴복하지 않도록, 간사한 마음이 나를 속이지 않도록 버티는 일이다. 친구는 그렇게 3년을 꼬박 공부했고, 브레이브걸스는 5년 간 전국을 누비며 위문 공연을 다녔다. 나의 생각도,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약점도 나중에는 '다시 보니 될 것 같다'라는 모습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 사실 지금도 힘은 좀 빠지지만, 이렇게라도 생각하니 기분은 좀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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