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짜리 뮤직비디오를 어떻게 만들어? 그걸 누가 보기나 해?'
메시앙 '시간의 종말' 뮤비를 만들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연주자들이야 악기만 잡으면 눈이 돌아가는 아티스트들이니 걱정이 없었지만 영상팀이 문제였다. 포로수용소, 요한계시록, 현대음악, 이 키워드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긴 했다. 컨택하는 영상팀마다 음악도 시놉도 너무 어려워 감이 안 온다고 했다. 그럴만했다. 한 시간짜리 프랑스 현대음악은 클래식 전문가가 들어도 쉽지 않으니까.
답답한 마음에 어릴 때부터 파리에서 알고 지낸 20년 지기 Y에게 전화를 걸었다. 날카롭고 예민한 감각으로 영상 광고 마케팅 회사를 키워온 Y라면 이 프로젝트를 이해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내세울 자존심 따위 없었다. Y의 회사 규모에 턱도 없을 부끄러운 예산과 시놉을 내밀며 말했다. '나 좀 도와줘...'
며칠 후 Y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누나, 이 프로젝트에 딱 맞는 미친놈이 하나 있어'
바로 첫 미팅을 잡았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변화하는 이 시대에 진정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뮤비 주제와 시놉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순수한 곰돌이처럼 천천히 설명하는 미친놈, 현 씨 성을 가진 20대 후반의 젊은 감독은 이 작품이 신선하다고 했다. 세 시간에 걸친 작품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오간 뒤 현감독과 나는 다음과 같은 작업 방향에 합의했다.
1. 이전에 없던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볼 것
2. 영상이 음악을 방해하지 않을 것
3. 촬영, 편집 기법에 있어 다양한 시도를 해볼 기회를 줄 것
왜 미친놈이라고 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한 3번의 방향들은 메시앙의 작곡 의도와 정확히 일치했고 2번은 음악의 핵심을 본능적으로 캐치해내는 천재적인 감각의 소유자임을 반증하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현감독을 선장으로 한 17명의 촬영팀이 만들어졌다. 천군만마를 얻는 순간이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의 정체를 몰랐다. 촬영 날 들어온 세트와 어마어마한 카메라 장비들을 보고 이들이 보통 프로가 아님을 직감했다. 세팅이 8번 바뀌는 복잡한 촬영임에도 불구하고 감독들 간의 어떤 잡음도 스태프들의 어떤 불만도 없었다. 심지어 즐기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장장 16시간을 촬영하는 동안 한치의 흐트러짐 없던 이 팀은 알고 보니 한국을 대표하는 아이돌 그룹의 뮤비와 유명 외제차 브랜드 광고를 찍는 프로 중의 프로였다. 촬영 날까지 메시앙 음악을 얼마나 반복해서 들었는지 마지막 편집 날까지도 멜로디를 외워서 흥얼거리는 이 팀을 보고 나는 혀를 내둘렀다.
Y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었다. 이 예산에 어떻게 이런 팀과 작업이 가능한 건지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해.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이야'
밤샘 촬영을 끝내자마자 공연 일정이 있어 울산으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였다. 잠시라도 잠을 청하려는데 따스한 햇살이 느껴져 눈을 떠보니 창밖에 엄청 큰 무지개가 떠있었다. 노아의 방주 때 언약의 상징으로 떠오른 무지개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한다. 마치 '내 선물 맞아, 그러니 끝까지 힘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찔끔 눈물이 났다.
그리고 2021년 12월 31일, 8개월의 여정 끝에 이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완성도를 위해 문체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두 번이나 부탁해 연장한 마감기간에 꼭 맞춘 날이었다.
사실 누가 보던 보지 않던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피어난 이 작품의 가치와 메시지를 담기 위해 우리는 끝까지 치열하게 고민했고 고집스럽게 달렸다. 그리고 그만큼 발견하고 성장했다. 이제 나머지는 하늘의 몫이다.
본격적으로 챕터들을 하나씩 소개하기 앞서 완전체가 주는 인상을 느껴보시면 좋겠다. 내용을 이해하기보다 음악이 주는 이미지와 '나만의 느낌'에 더 집중하며 보시길 추천드린다.
메시앙 MV '시간의 종말' by 앙상블 뷰티풀 랑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