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윤선도 원림
보길도 윤선도 원림은 다른 곳에 없는 독특한 휴양지 건축이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원림들과는 전혀 다른 이곳만의 이색적인 배치 형태가 신선하고 드넓은 조망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원림 전체가 명승으로 지정되어 보존 중이다.
매혹적인 보길도 원림의 조성과정에는 특별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조선 중기 문신 윤선도는 병자호란 당시 왕의 굴욕적 항복 선언에 낙망한 나머지 가산을 정리해 세상을 등지고 제주도로 향했다.
그런데 항해 도중 잠시 쉬려고 남도 앞바다 작은 섬에 배를 세운 윤선도는 보길도의 경관을 보고 한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늘이 나를 위해 준비했다"고 생각할 만큼 빠져든 윤선도는 제주살이 계획을 접고, 이곳에 정착해 원림을 만들었다.
당시 51세이던 윤선도는 가족과 함께 10여 년 동안 25채의 건물을 지어 원림을 가꿨다. 윤선도는 이후로도 관직과 유배로 섬을 떠나기는 했지만 84세의 일기로 생을 마치기까지 이곳에서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수많은 시가를 창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상을 등진 후 그곳에서 멀어질수록 좋다고 노래한 시인이 가꾼 원림은 더없이 자족적이고 담대한 멋이 있다. 윤선도는 대규모 노동력을 소유한 재력가였다고 한다. 작고 아름다운 섬 보길도는 그의 파라다이스 프로젝트에 딱 맞았던 듯하다.
이 원림은 윤선도 사후 완전히 폐허가 됐다가 300여 년 후인 근래 들어 재정비됐다. 건물은 보존되지 않았지만, 사람이 살지 않고 방치된 덕분에 초석과 건물터 같은 유적은 형체가 온전히 확인됐다. 원림 건축은 건물 자체보다는 경관과 공간의 조영법이 중요하다. 다행히 윤선도 본인과 후손의 관련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어 최초 건립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공사가 이뤄진 것이다.
시원한 스카이라인
전국의 다른 원림들과 구별되는 보길도 원림의 가장 큰 특징은 넓고 개방적인 입지다. 조선시대에 상류층이 집에서 떨어져서 따로 지은 별장을 원림이라 한다. 원림은 보통 본가에서 분리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계곡이나 야산 경치 좋은 곳에 위치했다.
그런데 윤선도는 보길도의 메인 골짜기 전체를 활용해 원림을 조성했다. 이 때문에 보길도 원림은 은폐, 차단, 숨은 경치 속 휴식을 특징으로 하는 일반적인 원림들과는 전혀 다른 경관을 갖게 됐다. 아마도 보길도 자체가 이미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숨은 섬이고, 완전히 은폐된 독립공간이니 더 이상의 간섭 차단과 격리 노력은 불필요했을 것도 같다.
보길도 원림이 들어선 골짜기는 천혜의 요새같이 아늑한 지형이다. 높은 산자락이 병풍처럼 빙 둘러 에워싼 형태다. 보길도 같은 산으로 된 작은 섬의 주거지는 보통 바닷가 가장자리에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윤선도는 바닷가를 벗어나 섬 안쪽 보길도의 내륙지대에 자리 잡았다. 산이 에워싼 골짜기 한가운데의 언덕배기가 "연꽃이 피어나는 모양"이라해서 '부용동'으로 이름 짓고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다.
이 만큼 넓은 지역 전체를 정원으로 가꾼 사례는 민간 원림 건축에서는 유례가 없다. 궁궐 건축의 규모 있는 원림으로 창덕궁 후원이나 경복궁 향원지 일원이 있지만 보길도 부용동만큼 개방적인 맛은 없다.
보길도의 하나뿐인 골짜기에 만든 윤선도 원림은 내륙의 원림들과는 다른 차원의 경치를 갖게 됐다.
광활한 대지의 간섭 없는 시야, 섬의 독립적인 풍광이 어우러져 드문드문 자리 잡은 건물의 흥취를 극대화한다. 부용동 골짜기 안쪽 거주지역에서 바라다 보이는 능선의 스카이라인은 특히 아름답다.
원림 공간배치
보길도 윤선도 원림은 세 권역으로 구성된다. 맨 먼저 바닷가에서 골짜기 입구 왼편에 연(못)지와 정자를 갖춘 세연정 권역이 있다. 이곳은 잘 가꿔진 연못과 호화로운 정자, 유흥과 연관된 몇몇 시설, 공들인 경관이 눈에 띈다.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전하는 공간이며, 건축적 가치가 높은 조경시설들도 나타난 곳이니 윤선도 원림 전체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고 꾸며진 곳이다.
두 번째 권역은 세연정을 지나 부용동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와서 골짜기 끄트머리 분지에 있는 거주지 구역이다. 사당과 윤선도가 거주한 낙서재가 있다. 낙서재 옆으로는 아들과 제자들이 거주한 곡수당 등의 건물이 있다. 원림에서 가장 안온한 지형에 자리 잡았고 입구 쪽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분지 지대이다. 그런데 이 분지지형은 산자락의 북쪽 경사면에 놓인 북향 지역이다. 이는 부용동 진입로는 물론 보길도의 섬 선착장 자체가 육지 방향인 북쪽으로 나 있으므로 자연스럽고, 높은 산이 제주 쪽에서 올라오는 거센 태풍을 흩어놓으니 유리한 지형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낙서재 건너편 산 중턱에 한 칸짜리 정자를 짓고 학문과 휴식 공간으로 사용한 동천석실 권역이 있다. 윤선도가 홀로 독서와 휴식을 취했던 공간이라고 한다. 이곳은 당시 선비들의 도가적 취향이 잘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용동 골짜기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가장 경관이 수려한 위치다.
이곳에는 윤선도가 공부한 한 칸짜리 공부방과 인근 암벽 아래 역시 최소화된 단칸 평면의 온돌방이 지어져 있다. 옆에는 돌로 축대를 쌓고 연못을 조성해서 생활용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세 권역이 떨어져 있는 거리는 몇 개의 마을이 들어서고도 남을 만큼 멀다. 윤선도는 골짜기 전체를 하나의 공간으로 삼고 거리 제약 없이 대담하게 원림을 설계한 것 같다. 현재 복원한 건물들은 몇 동에 불과하지만 윤선도와 자손이 거주할 당시에는 수십 채의 건물들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5채의 건물을 지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살림규모와 딸린 인원의 규모를 고려하면 부용동 골짜기 안에는 아마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세연정과 세연지
마을 진입부에 자리 잡은 세연정은 연회를 즐기던 장소였다. 건물은 전면 마루를 깔고 모든 창호는 들어 열개 문을 걸어 개방성을 높였다. 특이한 형상의 바위와 소나무 등 각종 정원수로 주변 경관을 수려하게 조성했다. 정자에 앉아서 바라보는 경치가 좋다. 계곡물이 많을 때에는 세연정을 가운데 두고 사면이 연못이 되도록 배치됐고, 정자 사방을 빙두른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세연정 인근에는 각각 동대와 서대로 불리는 단이 조성되어 있다. 나선형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구조인데, 관련 기록에는 연회시 무희가 양편에 올라서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 연지에는 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특별한 장치가 있다. 연지에 물을 공급하는 방식은 두 단계로 이뤄진다. 먼저 계곡물을 막아 일차로 물을 가둬서 임시 저수지를 형성한다. 이를 계담이라고 불렀다. 계곡 쪽 연못이라는 뜻이다. 그다음 단계로 계담에서 다시 연지 쪽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도록 했다. 이처럼 두 단계의 물 공급 방식을 취한 것은 물살이 센 계곡물이 연지로 직접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임시 저수지인 계담에서 연지로 물을 들여보내는 장치도 세심한 계산을 거쳐 설치됐다. 계곡 쪽 물이 들어오는 입구는 물 구멍을 다섯 개 두고, 연지 쪽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출구는 세 구멍을 만들어 숫자를 서로 달리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연지로 들어가는 물의 양을 조절할 수 있다.
특히 감탄스러운 대목은 연지로 물이 들어가는 입수구는 경사를 높게 설정해서 입구와 출구의 낙차로 물이 쉽게 유입되도록 한 것이다. 또한 연지에 들어온 물이 바닥 쪽으로 깔리도록 함으로써 호수의 표면에 물결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물 표면은 잔잔하게 유지되면서도 자동 수위 조절이 가능한 구조를 갖춘 것인데 이를 회수담이라고 했다. 이 정도의 세심한 계산과 고려가 깃든 연못은 흔치 않다.
이 연못에서 뱃놀이도 했다고 하는데 세연정과 세연지가 호화로운 공간이었음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나는 보길도 윤선도 원림에 두 번 다녀왔는데 처음 답사시 가장 보고 싶었던 구조물이 바로 판석 보였다.
판석보는 연지를 건너서 세연정으로 가는 다리다. 이 다리는 이중 기능을 갖는다. 평상시에는 정자로 이동하는 통로 구실을 하지만, 비가 많이 와 계곡물이 불어날 때는 물막이 보 기능을 한다. 그래서 이 구조물의 이름도 두 개다. 판석보라고도 하고 굴뚝다리라고도 부른다.
판석보는 평평한 판석으로 쌓은 보라는 뜻이고, 굴뚝다리는 상류주택의 구들에서 연기가 지나는 연도나 굴뚝을 만들 때처럼 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판석보이자 굴뚝 다리인 이 구조물은 크고 넓적한 판석을 양편에 세우고 생석회로 속채움을 한 다음 다시 판석을 덮어서 만들었다. 이 판석보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 이곳 윤선도 원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물이다. 하나의 구조물로 두 가지 기능을 충족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동천석실 권역
부용동 가장 안쪽에서 주거지인 낙서재가 있는 능선 맞은편 산 중턱에 절경을 차지해 지은 한 칸 정자가 있다. 이곳은 보길도 윤선도 원림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위치이자 주인이 혼자 사용하는 공간이다. 부용동 골짜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내려다보는 풍광이 시원하다. 울창한 등산로를 지나면 나타나는 깎아지른 듯한 암반 위에 단 한 칸짜리 정자만을 올려놓았다.
조용히 공부하고 휴식하는 곳으로 동천석실이라는 이름은 신선이 사는 곳을 상징한다. 당시 선비들의 도교적 취향도 잘 나타난다. 동천석실 바로 밑에는 역시 한 칸짜리 온돌방을 지었다. 온돌방의 문을 열고 앉아 있으면 부용동 골짜기 전체가 내려다 보인다. 동천석실과 온돌방 왼쪽으로 인공연못을 조성해서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동천석실 권역은 보길도 윤선도 원림의 매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성리학자이자 시인인 윤선도의 취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낙서재와 곡수당 영역
부용동 골짜기 가장 안쪽에 살림집 권역이 위치한다. 사당과 낙서재가 있는 권역은 핵심 주거공간이다. 윤선도가 기거하고 생을 마감했던 낙서재가 있고, 그 왼편으로는 높게 돌담을 쌓아 보호한 사당이 보인다. 그런데 이곳 사당의 위치는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안채(정침)의 오른쪽 뒤편에 사당이 위치하는데 윤선도 원림에서는 안채 왼편 뒤쪽에 있다. 이는 마을과 집 자체가 북향이기 때문이다. 즉, 방위상 정침의 동편에 사당을 배치한다는 주자가례의 원칙을 따라 옳게 배치됐지만, 향이 북향이라서 뒤집혀 보일 뿐이다.
전통건축에는 생각보다 북향집이 많다. 풍수지리에 따라 남향이나 동서향이 더 선호된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로 집을 지을 때는 이론적인 선호 방향보다는 산세와 지형의 여건에 따라 결정됐기 때문이다.
낙서재 아래쪽으로는 곡수당과 서재가 있다. 곡수당은 낙서재에서 내려오는 물이 굽이치는 위치에 지은 집이다. 윤선도의 아들이 거주하며 휴식을 위한 목적으로 조성한 공간이다. 곡수당은 낙서재 골짜기에서 흐른 물이 굽어 흐르는 위치에 지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곡수당과 인근에 지어진 서재는 윤선도에게 가르침을 받는 유생들의 배움터였다고 한다. 서재는 맞배지붕에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양 측에 온돌방을 들였다.
곡수당과 서재 앞에는 아기자기한 조형물들이 눈길을 끈다. 곡수당 건물 우측에는 깊게 석축을 쌓아 만든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 물을 끌어오는 장치가 이색적인데, 통나무를 베어 속을 파 내고 길게 이어서 물길을 만든 것도 그중 하나다. 또 계곡물이 굽어져 흐르는 위치에는 석축을 튼튼하게 쌓고 돌다리를 두 개나 만들어 놨다. 강우량이 많아 계곡물이 불어 날 때를 대비한 것이다. 대형 판석을 사용한 평석교와 홍예를 튼 홍예교가 위아래 나란히 설치된 것도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