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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진 Jun 23. 2022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도 괜찮아

말랑한 책으로 단단한 삶을 사는 법, 매거진 <로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누군가 물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가 물었지만 넘어가자. 실제로 평소에 누가 이런 걸 묻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게, 나 하고 싶은 거 뭐지. 혼자 쉬고 싶다. 남들(남편) 일할 때 아이들 등원시키고 혼자. 좋아하는 읽을거리와 커피가 있는 집에서. 좋은 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한번 좋아하면 계속 좋아하는 편이다. 다만 좋아지기 시작하면 너무 좋아질까 봐 거리를 둔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빠질까 봐 두렵다. 성장 환경인가.


말이 나왔으니 묻지도 않은 성장 환경 얘기를 좀 해보겠다. 기억 속의 나는 꽤 독립적인 어린이였다. 부모님 두 분이 일하셨기 때문에 주로 혼자 있었고 하교 후 집에 오면 검정과 회색이 뒤섞인 패브릭 소파 한쪽에 등을 붙이고 책을 읽었다. 주로 선과 악이 모호하고 기묘한 서사의 세계 명작 그림책, 전래동화, 신화, 만화책, 가끔 유행하던 <공포 특급> 같은 것을 읽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등 뒤가 서늘해져 소파에서 등을 떼지 못했던 기억. 벽지의 무늬를 살피며 저건 꼭 얼굴처럼 생겼네, 눈 코 입 모양을 찾아낸 게 뭐 그렇게 이상하고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부모님 중 누구도 책을 읽으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가끔 외할머니댁에 놀러 가 뭔가 읽고 있으면 얘는 책 참 좋아한다며 칭찬을 하셨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게 칭찬받을 일인가. 언젠가 말했지만 읽는 사람들은 외롭다.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다. 읽는 행위는 자발적 고독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태생적 외로움을 수반하니까. 외롭거나 말았거나 학생 때는 분명 나쁘지 않은 취미였는데 생활인이 되고서는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독서가 너무 고와 보인다는 게 문제인지도. 이를테면 불리한 상황에서 이런 공격을 받는다. “너 책은 뭐하러 읽냐. 그거 읽어서 뭐 할래,”하는. 아니 뭘 하려고 읽는 건 아니고. 제가 못하는 게 많지만 그게 책 때문은 아니지 않나요. 책이 무슨 죄가.


헤르만 헤세는 <책이라는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일상을 잊고자 책을 읽어서는 안 되며 의식적으로, 더 성숙하게 우리의 삶을 단단히 부여잡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적었다. ‘book-smart’, ‘street-smart’ 같은 말이 왜 있겠나. 현실을 모르는 백면서생을 경계하는 말일 테다. 삶을 위한 독서라니, 이상적 독자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실용서인가.


때때로 필요하겠지만 실용서를 읽지 않는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 사실은 나도 죄책감을 느끼던 중 매거진 <로플>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를 인용한 코멘트를 읽다가 깨달았다.


“방학 중의 독서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평화롭고 방해받지 않은 시간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나는 독서라는 피난처로 숨곤 했다.” -마르셀 프루스트

방학이란 단어는 이미 우리와 멀어졌지만 평화롭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에 우리는 여전히 책을 읽는다고. 독서는 숨이 가쁜 우리에게 좋은 ‘피난처’가 되어준다는 말을 읽는 순간 섬광이 스쳤다. 아, 피난처였어. 에피파니는 사소한 순간에서 오는 법. 애어른이 어른 아이가 되는 아이러니를 아시는지. 남들 다 사는 삶이 왜 어려운 어떤 어른이에게 독서는 다정한 휴식일 수 있는 것.


보뱅과 아니 에르노 그리고 아름다운 책의 물성에 대한 팬심으로 읽은 1인 출판사 1984Books 대표의 인터뷰도 좋았다.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단단한 삶,” 나는 그것을 살고 있나 한참을 생각했던. “잘 쓰고 싶다는 마음에서 ’잘‘이라는 한 글자만 덜어내면 된다”는 황수영 작가의 에세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서두로 ’ 대화‘로서의 ’ 읽기‘를 제안하는 에디터 레터도 마음으로 읽혔다.



묻지도 않은 어린 시절이 떠올라 공간이 부족해졌지만, 결론은 다정한 쉼표 같은 매거진과의 만남으로 좋아하는 것과 좀 더 거리를 좁혀도 된다는 약간의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 ㅡ (엄마)지만,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해도 괜찮아. 괄호 안은 누구든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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