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진 Jun 20. 2022

공부도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글 쓰는 사람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곽아람<공부의 위로>

<어땠을까>라는 노래를 아시는지. 작사 작곡 싸이, 벌써 10년 전 노래다. 친근한 외모 때문인지 코믹한 이미지가 되었지만 나는 그가 매우 진지한 싱어송라이터라고 생각한다. 가만히 듣고 있자면 가사가 꽤 좋다. 어려운 얘기를 쉽게 하는 당신이 진짜 챔피언.


그 시절 첫 직장을 다니며 곽아람 작가의 첫 책을 읽었더랬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을 읽으면 주제넘게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어땠을까. 어쩐지 이 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싸이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래서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좀 더 행복했을까. 공부를 좀 더 할 수 있었다면. 기자가 될 수 있었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해봐야 의미도 끝도 없고 답은 더 없는 질문이지만 다들 가끔은 그런 생각, 하지 않나. 인생은 한 번이니까. 그만큼 그녀의 글이 부럽고 좋다는 뜻이다.

표지가 예쁘다. 생존 작가의 작품 중 최고가로 거래된다는 독일의 대표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읽는 사람>. 언뜻 스칼렛 요한슨을 연상시키는 모델은 작가의 아내라고. 역시 곽아람 작가다운 안목이다. 고고미술사학 전공 후 꽤 오래 미술 전문기자였던 그의 첫 책 <그림이 그녀에게> 표지는 에곤 실레의 작품이었다.


제목도 좋다. 위로템의 주 소비자로서 <공부의 위로>는 잔잔하지만 탁월하다 생각했는데 저자의 원래 계획은 <교양 있는 여자>였다고. 아닌 게 아니라 교양을 말하는 서문이 마음을 울린다. “교양이란 겹의 언어이자 층위가 많은 말, 날것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일, 세 치 혀 아래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넣어두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하, 이러니 반해 안 반해.


이 책을 통해 또래 독자가 대학 시절을 다시 누리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바람대로 구성은 1학년 ‘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으로 시작해 4학년 ‘공부의 진정한 쓸모에 대하여’로 마무리된다. 오랜 팬심으로 객관적인 리뷰는 불가능하나 좋았던 문장들을 떠올리면 언젠가 ‘감각의 언어’를 말하며 인용했던 부분이 첫째. 프랑스어 원문으로 읽었다는 카뮈의 <결혼>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몽환적이고 나른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격렬하게 살이 부딪치고 실핏줄이 터져 뜨거운 피가 튀는 것 같은 생동감이 깃든 글”(p.50)이라고. 아아, 대학 때 프랑스어를 배웠어야 했다.


인문학과 착각에 대한 언급도 인상적이다. “인간은 자주 착각하고 착각을 진실로 믿어 가끔씩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깨어나 슬퍼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착각한다.”(p.229) 흔들릴 수 있는 존재지만 다시 살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힘이라고. 아니 착각 좀 하면 어떤가, 인간은 철들 때가 죽을 때라던데. 세상을 장밋빛으로 볼 때 목표에 닿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지만 때로 세련된 자기기만은 필요하다. 착각의 쓸모랄까.


그러나 무엇보다 인문학의 쓸모란 역시 ‘무쓸모’에 있을 것. 저자는 4학년 때 수강한 라틴어 수업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천상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고 그 언어는 대부분의 수강생들에게 삶의 잉여였지만 분명 ‘위안’이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쓸모를 요구하지만 유용한 것만이 반드시 의미 있지는 않으며 실용만이 답이 아니라는 그런, 위로.”(p.306)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 배운다,’ 던 한동일 교수님의 <라틴어 수업>도 떠올랐다.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서라도 비물질적인 낭만과 사랑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아이 둘 엄마가 되어서도 여전히 나이브한 구석이 있는 문송인의 생각이지만.

조심스럽지만 언젠가 친구와 그런 대화를 했었다. 이유야 제각각이겠으나 책을 찾는 사람들은 어딘가 마음이 조금 아픈 사람들 같다고. 저자의 말에서 어렴풋이 답을 찾았다. 천생 모범생인 게 도리어 부끄러웠다는, 칼끝 같은 예민한 성격, 불면과 우울증으로 병원을 전전했다는 저자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건 글 쓰는 사람이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숙명 같은 거라고 말한다. 칼 융의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 개념.


ㅡ상처 입어본 사람만이 타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도 책을 찾는 독자 1인은 남아있을, 어쩌면 앞으로 남을 상처 앞에서 조금 담담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글이라도, 아니 이런 나여도 괜찮다면.


어땠을까, 하고 물었지만 아마도 비슷한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고요. 오늘도 후회하지 않게, 잘 :)
매거진의 이전글 0.5초 만에 자신감을 되찾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