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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진 Jun 25. 2022

사는 거 별 거 없다, 좋은 에세이의 힘

박혜란, <오늘, 난생처음 살아보는 날>


“치열하고 날카로웠던 젊은 날은 젊음 그대로, 좀 더 너그러워지고 깊어진 지금은 이 모습 그대로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 출근길에 받은 책 속 흔한 프로필 문구가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너그럽고 깊어지는 것. 그것이 나이 듦의 매력이자 연장자의 의무처럼 느껴져서다. 우아한 할머니가 꿈이라고, 말한 적 있던가. 우아는 무슨, 잊었던 호기로운 꿈을 떠올리며 그것과 나는 얼마나 멀어졌는지 헤아려 본 책. 일흔이 된 저자의 일상이 담긴 에세이다. 여성학자이자 가수 이적의 어머니인 박혜란 작가가 썼다.


‘우아한’ 척하려면 말하기 어렵지만 기실 ‘우아한’ 할머니를 위한 첫 번째 관문은 경제적 안정이다. 전문가들은 인플레이션을 넘어 스태그플레이션이 온다고 떠들고 오르지 않는 것은 내 월급뿐이고 일하지 않고도 읽고 쓰고 그림을 사는 품위 있는 노년을 꿈꾸며 사들이는 작고 소중한 펀드와 주식은 마이너스가 되었다. 모르고 기다리면 오르겠지, 몰라도 될 슬픈 소식을 자꾸 때맞춰 카카오톡이 알려준다. 때마침 아이에게 충치가 생겼고 여섯 살 아이에게 충치가 생긴 것은 엄마 책임이라는 말을 들었고 죄책감을 뒤로하고 회유와 협박에 피카츄 인형까지 걸고 겨우 치료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세상에, 밥솥이 열리지 않았다. 늘 말썽이었던 밥솥 뚜껑이 드디어 운명하신 것. 아주 때가 알맞다. 배고파서인지 아파서인지 들으란 듯 크게 우는 아이를 달래며 냉동 볶음밥을 데워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기절하듯 잠들었던 지난밤이었다. 어김없이 돌아온 출근길에는 얼굴에 뾰루지가 났고 때맞춰 비가 왔고 슬프지도 않은 책을 읽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고 도대체 왜 우냐 이 나이에 잘 우는 것도 병이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 하다 보니 비가 멈추지 않았다.




조금 ‘내려놓게’ 된다고, 언젠가, 나의 엄마가 그랬다. 나이 들면 좋은 게 있(긴 있)냐는, 우문에 대한 현답이었다. 가는 세월은 잡을 수 없고 놓아지는 것도 들어 올린 것도 없고 너그러움과 깊어짐은 커녕 뾰족하고 얕기가 이를 데 없어 미련과 아쉬움에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구멍 나기 일쑤인, 아이의 충치 같은 일상.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도 잘 있거라, 뒤끝 없이 보내줄 수 있을까, 그러면 좋겠다.


동아일보 기자 생활을 하다 결혼 후 삼 형제를 서울대에 보내고 뒤늦게 여성학 공부를 시작해 여성학자로 활약한 이력을 보면 치열하게만 살았을 것 같은데, 저자는 “대충대충 살았으니 지금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거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용을 썼으면 벌써 지쳐 쓰러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적인 고백도 잊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자면서도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욕심이 여전히 꿈틀거린다고.

 

그래도, 이만하면 됐지. 일흔이 되어서도 쓸데없이 남을 기웃거리다 마음이 부글거릴 때면 냉큼 이 말을 떠올린단다. 나에게 하는 말 같다. ‘행복해할 줄 아는 사람들’ 꼭지의 겸손하고 단단한 삶을 읽다 보면 부끄러워지기도, 부러워지기도 한다.


‘시시때때로 후회와 만족 사이를 오간다‘(아니 너무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는 저자의 결혼 이야기도 재밌다. 남편을 좋아한 데는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는 이유가 가장 컸는데 알고 보니 야망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 은퇴 후에는 호르몬 탓인지 예민해지기까지 했다며 불만을 털어놓다가도 일흔이 넘으니 결혼 정년제나 졸혼 제도 번거롭다고, 더 이상 기대도 실망도 없으니 세상 평화롭다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들을 읽으며 혼자 낄낄대다 보니 묘한 따뜻함이 남았다.


열심히 대충, 살다 보면 모든 것은 다 지나가게 마련이란다. 멋진 척 1도 없는 멋진 할머니의 느슨한 이야기 한잔에 조금은 덜 외로워진 느낌. 쿠팡에서 산 오천구백 원짜리 피카츄 인형 덕분에 아이의 충치 치료는 잘 마무리되었고 마이쮸를 먹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으며 나에겐 쌀밥처럼 새하얀 새 밥솥이 생겼다. 술도 없이 시시콜콜한 내 얘기까지 쏟아내고 나니 정말이지 잠시 모든 게 괜찮은 기분마저 드는 밤. 사는 거 별거 없다. 좋은 에세이의 힘이란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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