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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한 책생활 Jul 18. 2024

은목서에 꽃이 피려면

황인찬 <잠시 고백하는 사람>, 김원영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도 등장하는 은목서는 그 향이 만리까지 퍼진다고 해서 ‘만리(萬里) 향’이라고도 불린다.


“은목서에 꽃이 피려면 어떤 다른 시간이 필요하다.”


조용미 시인의 시집 《당신의 아름다움》 중 <불귀>의 문장이다. 빗소리와 함께 이 시구가 떠오른 것은 나의 은목서에도 다른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불안과 권태, 부끄러움의 어둠을 돌파할.



잠시 고백하는 사람


황인찬 시인의 7월 에세이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을 읽었다. 십여 년 전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그의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를 낭독하던 때부터 좋았다. 나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감각적인 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분명 눈으로 읽는데 귀로 듣는 기분을 아시는지. 기다렸던 ‘난다 시의적절 시리즈’ 7월 책이다. 에세이 중 제일은 시인의 에세이인데 좋아하는 시인의 에세이라니. 지난 주말 배송받아 단숨에 읽었다. 마시면 안 된다. 읽는 피로회복제.


시의 주된 정조는 슬픔이다. 황인찬 시인은 모든 시는 어느 정도 연애 시이며 연애시가 그리는 것은 사랑의 불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시란 본질적으로 멀어지는 것이며 그 불가능이 욕망을 낳기 때문. 그게 시가 슬픈 이유다.


요즘 내 주된 정조를 묻는다면 부끄러움이다. 등원, 등교, 출근. 매일 비슷한 업무를 쳐내고 돌아와 아이들을 돌보고 틈틈이 읽고 쓰고 달리지만 나아지는 것은 별로 없다. 이것이 너의 한계. 너는 이정도의 사람. 안 할 수도 없다. 좀처럼 낫지 않는 아이의 아토피도 한몫.


그나마 차곡히 쌓았던 읽고 쓴 기록은 튀르키에 해커들과 함께 안드로메다로 사라졌고 매일 힘을 내자고 셀프 응원을 해보지만 왜인지 안쓰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외로워도 슬퍼도 울 수는 없다. 은목서에 꽃을 피우려면 다른 시도가 필요하다. 좋은 것을 좋다고 알리는 것, 좋음이 흘러넘쳐 타인의 삶도 빛나게 하는 것. 그리하여 함께 오래 빛을 잃지 않는 것.


“시를 사랑하는 만큼 저 자신을 미워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그러하시라 믿습니다.” 작가의 말이다. 좋은 에세이에는 부끄러움이 담겼다. 감추고 싶은 수치심, 자기혐오, 그래도 아직, 희망을 말하는 수줍은 문장들이 부끄러움을 덮어 다독인다. 우리는 모두 별로지만 함께면 꽤 괜찮을지도.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구겨진 마음을 펴는데 시를 사랑하는 것으로 부족하다면 김원영 저자의 신간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을 권한다. 몇 해 전 그의 전작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고 하, 섹시한 글은 이런 글이지, 감탄했던 기억.


저자 김원영은 서울대에서 사회학과 법학을 공부했고 휠체어 타는 변호사이자 작가다. 공연 창작자로서의 도전기가 담긴 이번 책의 부제는 ‘법과 제도에 갇힌 평등을 치열한 삶의 무대로 끌어올린 몸의 사유.’ 시의 정조가 슬픔과 부끄러움이라면 김원영 변호사는 그런 정조 따위 삶에 들일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에도 읽는 순간 확신했다. 힘 있고 매력적인 글. 파스칼 키냐르의 관능보다 더 끌리는 욕망과 에너지, 그리고 솔직함. 글은 21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무용원 대학원 과정에 지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말한다.


“나는 좋은 무용수가 되고 싶었고 공연 연출에 관한 지식과 경험을 체계적으로 쌓고 싶었지만 그 욕구가 한예종에 지원한 진짜 이유일까. 내 인생에서 꽤 오래 부재했던 모종의 극적인 순간을 그저 찾아 헤매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그는 덧붙인다. 그러나 건강하고, 장애 없고, 아름답고, 높은 근력과 민첩한과 유연성으로 다져진 무용수 수험생들 사이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현기증이 몰려왔고 춤을 보일 구체적인 상상을 할수록 굴욕의 구렁텅이 고꾸라질 것 같았다고. 소수자의 경험이고 뭐고 평범하고 안전한 다수자이고 싶었다고.


동기야 어떻든, 은목서에 꽃을 피우려면 다른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이 결코 쉽고 순탄할 리 없다. 하지 않을 이유는 언제나 많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도 행동하는 것이라던가. 최소한 그의 치열한 삶의 기록에 가슴에 뛴다면, 부끄럽고 안전한 다수자로 남고 싶지 않다면, 당신과 나에게도 다른 시간을 살아갈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닐지.


우리의 용기에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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