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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사진 속 웃음을 되찾을 수 있기를

예전 사진을 보며 떠올리는 괜찮았던 나

by Karel Jo


나는 지난 2년 간 우울증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나 자신이 조각나 있음을 바라보면서, 더 이상 흩어지지 않도록 하나씩이라도 스스로를 모아 나가야 했기에 삼켰던 수많은 알약과 스스로 곱씹어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기억들을 뒤로한 채, 이제는 항우울제도, 심리치료도 더 이상은 진행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때때로 그 오랜 친구는 틈만 나면 내 손을 잡으려 드는 것 같지만, 적어도 나의 일상에 매일같이 스스로를 견뎌내야 하는 때는 지나간 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조심스럽게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요새 조금 달라지신 것 같다' 는 말로.


확실히 우울증 치료를 받던 지난 2년간에 비하면 더 이상은 바닥에 있지는 않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매일매일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사람임을 입증해내야 했던 그때에 비하면, 나는 이제 내 스스로가 반드시 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버리고 나답게 사는 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예전처럼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느 날, 직장 동료 한 명이 내 예전 사진을 같이 보던 때에 그렇게 말했다.


"사진 찍을 때 좀 웃지 왜 이렇게 다 죽상이에요. 옆에 아내는 행복하게 웃고 있구만"


그 말을 듣고 내가 우울증을 앓기 시작한 전과 후로 나누어 사진을 보다 보니 나는 명확하게, 어느 시점부터 웃고 있지 않았다.




어렸을 때 사진관을 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집에는 항상 좋은 필름카메라, 나중엔 고화질 디지털카메라가 집에 있었다. 아버지는 바빠서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들을 사진으로라도 남겨 놓고자 쉬는 날이면 우리를 데리고 경치 좋은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너무 자주 사진을 찍으니 나는 오히려 사진 찍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힘들지 않았던 시기에는 엷은 웃음이 사진 안에 있었다. 웃을 줄 모르지는 않았기에, 비록 한쪽으로 웃는 썩소가 대부분일지라도 사진 속의 나는, 내가 보기에도 삶의 근심을 짊어지고 사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다 아내를 만나기 시작하고부터는 정말로 행복하게 만개한 웃음 짓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러던 나는 언제서부터 웃음을 잃었을까. 언제부터 왜, 사진 안에서 웃음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괜찮아졌다는 말을 듣는 지금도, 스스로도 그리 힘든 마음을 많이 갖고 있지 않음에도 여전히 사진 속의 나는 작은 웃음을 간신히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무표정이다.


웃음은 억지로 쥐어짜 내는 것이 아닌, 길가에 피어오른 민들레꽃처럼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피어오르고 또 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굳이 사진 속 웃지 않는 나를 보고 '아직도 나는 괜찮지 않구나'하고 조급해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매일매일 내가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은 줄어들고 있고, 그런 나를 의지해주는 사람들도 감사하게도 나를 많이 돕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사진의 나도, 현실의 나도 비로소 미소를 진심으로 머금은 채 멋들어진 추억을 한번 더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아내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많이 웃고 살면서 그렇게 늙어가자는 약속을 지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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