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노동자라는 이름 하에 감춰진 고독
2011년 말 겨울, 나는 내가 다니던 첫 회사인 플라스틱 사출회사를 그만두고 체코의 자동차 부품사 현지채용이 결정되면서 내 또 다른 꿈을 펼칠 준비를 마쳤다. 체코슬로바키아어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마치고 교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유학 자금을 내 손으로 벌고 현지 적응도 한다는 개념으로 결정한 나의 20대 중반부터 시작한 해외생활은, 결코 녹록지는 않았다.
보통 학교나 학원에서 배우는 외국어들은 아무리 일상생활에 대한 상황이나 표현을 가르쳐 준다 하더라도, 아무래도 직접 가서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상황들이 많이 생긴다.
예를 들어, 회화책에서 은행에 돈을 맡긴다거나 하는 표현은 굉장히 널리 알려져 있겠지만, 대출 이자가 얼마인지, 보통예금과 적금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한국어로 봐도 잘 알아듣기 힘든 상황이 아니겠는가? 또는 병원에 가서 배가 아프다거나, 감기에 걸렸다거나 하는 표현은 흔해도, 화농성 여드름이라든지, 링거 주사를 맞고 싶다는 말은 일상생활을 겪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학과에서 그래도 체코어를 꽤 잘한다고 평가받는 나로서도, 막상 그러니 현지에 나가니 도저히 알 수 없는 표현들 투성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체코에서도 꽤 시골, 우리나라로 치면 자동차 부품 협력사가 많은 울산 근처의 경주나, 창원 등에 속하는 지역에 있다 보니 일단 학교에서 배운 표준 체코어와 달리 억양 자체가 체코어에서도 사투리를 쓰는 지방이었다.
당연히, 표준 체코어만 배운 나의 억양을 듣고 내 동료들은 날 보면서 “이거 완전 프라하 샌님이구만?”이라고 능글맞게 놀려대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의 동물이라고 일 년 가까이 지내다 보니 나는 그들의 생활에 완전히 동화될 수 있었다.
나의 필명인 Karel Jo에서 Karel은 영어 이름으로 치면 Charles인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동료들은 나에게 더 이상 ‘카렐’이라는 이름이 아닌, 여러 가지 애칭으로 날 불러주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넌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이미 체코인의 피인 맥주가 흐르는 훌륭한 체코인이라는 농담도 건네며 주말마다 다 같이 파티를 하거나, 축구를 보러 가거나 했었다.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나 자신이 체코라는 나라에 완전히 동화되었다고 착각했을 정도로 체코가 편하게 느껴졌다.
여름과 겨울에 한 번씩 10일 정도 공장을 셧다운 하고 유지보수 정비 작업등을 하던 때에 나는 보통 한국으로 돌아가 오랜만에 가족들과 친구들하고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27살이나 28살 정도에는 아직 친구들이 채 취업을 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으로 복귀하면 그 당시 유행했던 작은 화장품 등을 한 아름 안고 친구들을 만나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들의 삶과 내 삶을 응원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고향이 주는 힘’을 만끽한 상태로 충분히 재충전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29살의 여름, 이제 친구들이 대부분 취직하고 나와 같은 직장인이 되었던 때, 나는 이미 대리로 진급해 직장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상태에서 지친 마음으로 한국에 다시 여름휴가를 나왔던 때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제 서로의 시간이 맞지 않는 시기가 오고야 말았다. 나에게 있어 그 시간은 2주간 한국에 아무런 일할 필요 없이 마음과 몸을 쉬게 하는 휴가였지만, 친구들에게 그날은 어느 날과 다를 것 없는 일상의 순간이었다.
시간을 내 보려고 해도, 바쁜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약속이 늘어갔고, 그렇게 2주 동안의 시간 동안 반절도 안 된 친구를 만나고 다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어른이 된다는 게 이런 건가, 하고 곱씹을 무렵 프라하 공항에 내리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무심결에 “아, 집에 왔네 이제”라고 나도 모르게 내뱉었고, 스스로에게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스스로가 체코를 집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에 내가 놀랐던 이유는, 나에게 있어 체코는 내가 좋아하는 나라이긴 했어도, 여전히 제1의 고향은 한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가 거듭할수록 마치 고향에 ’여행‘을 가는 상황이 반복되고, 그 고향에서 만날 수 있는 친구와 가족들이 점점 멀어지면서 내가 태어난 곳에서 내 스스로 어색함과 동떨어짐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해 버리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정작, 그 체코라고 해서 현지 동료들이 나를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한 들 그들 또한 보이지 않는 외국인에 대한 벽이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때부터 아마 나의 우울증은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설상가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사회에서 일만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지도교수는 유학을 할 생각이 없는 놈이라 생각했는지, 또는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다 하더라도 돈이 떨어지면 다시 언젠가는 공부를 그만두고 사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후배 중 유복한 집안에 있던 친구를 바로 교수님 추천으로 유학길에 보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더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나 있어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다는 ‘이방인‘이라는 고독에서 오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상실감, 나는 그때 그를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동안 웃는 얼굴로 지냈음에도 속으로는 웃지 못하는 자신의 이질감을 받아들이지 못해 많은 술과 담배로 하루를 그저 지워내기에만 바쁘고, 한 순간의 쾌락을 다음날 지독하게 후회하는 날도 잦았다.
아마 내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나의 연애는 선명하게 남고, 그 순간순간의 행복은 있었지만, 나를 더 낫게 하는 연애가 아닌 나를 잠식해 잡아먹는 그런 연애였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삶의 이유를 찾기 힘든 나는 30살이 되던 해에, 4년의 해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채 한국 사회에 소속된 지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사랑하는 지금의 아내와 그 사이에 나온 두 딸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충분히 성공한 내 직책도 얻으면서 겉보기에는 충분히 성공적으로 사회에 복귀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수도 있지만, 아마 때때로 솟아오르는 나의 기분부전증과 우울감은, 이때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시절 충분히 해소되지 못했던 나의 불안감을 그저 현재의 행복으로 뒤덮어놓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낸 나날 속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도, 누구의 공동체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어도 내가 살아낸 날들은 결코 가벼운 날들이 아니었다. 나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존재 자체로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고뇌하며 탐구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의 주변에도 살고 있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만리 타향에서 각자의 꿈을 위해 달리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나는 지금 각자의 위치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사랑해 주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그 어느 장소에서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사람’으로 기억하기를 소망한다. 잘 살아왔고, 잘 버텨 내었다고 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