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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기도하는 무신론자다

내 안에서 믿음이라는 걸 갖게 된 그날

by Karel Jo


사진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수많은 앨범이 여전히 집 한켠에 놓인 그 사진들 속에는, 대여섯 살쯤 되는 내가 울면서 미사포를 쓰고 촛불을 들고 있는 사진이 한 장 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나는 군산의 어느 한 성당에서 세례를 받거나 하는 중이라 하였고, 그래도 남자아이라고 여자애 같은 걸 씌워주니 굉장히 싫어했다고 어머니는 말씀해 주셨다.


세례명이 요한이라는 말을 끝으로, 나에게 종교란 굉장히 멀리 동떨어진 나와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분명한 무신론자였다.


그런 나와 달리 삼 남매를 키우기 위해 일주일을 바쁘게 보내시던 부모님은 가끔 성당에 가시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어느 순간부터는 일요일에 미사를 포기하셨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니 두 분은 교회로 적을 옮겨, 특히 어머니께서 꽤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이어가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체코에서의 오랜 해외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지 1년 가까이 되는 날,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다.


"네 할아버지는 천주교, 나는 기독교, 서로 종교는 다르지만 나 또한 네 할아버지에게 믿음의 힘이라는 걸 배울 시간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인 나는 시간이 없어 너에게 뭘 보여줄 시간은 없었구나. 그래도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너도 한 번 교회를 다녀 보지 않겠니?"


아버지는 항상 본인께서 바쁘신 시간을 이유로 나에게 정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셨던 걸 내심 마음에 걸려하시곤 했다. 특별히 내키는 일도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16년 1월 첫날, 나는 안산 어느 한 교회의 새 신자가 되었다.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문학적으로, 책으로서의 성경은 나에게 분명 재미있는 책이었고, 나는 성경을 종교인으로서가 아닌 문학인으로서 탐독했다. 그런 나를 처음 청년부 교인들이 만났을 때, 나는 두 가지 눈빛을 느꼈다. 하나는 왜 30살이 넘어서 갑자기 종교에 관심을 뒀을까 하는 호기심, 그리고 하나는 그저 여자나 만나러 온 게 하는 경계심.


물론, 그 경계심이 허물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성실하게 마음의 벽을 허물고 종교를 내 나름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새 신자 교육을 거쳐 청년부 셀에 배치되었고, 일요일이면 예배를 나간 뒤 예배 후에는 셀모임을 통해 그날의 감상을 나누며 내 삶의 종교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진심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셀원 및 청년부 모두도, 그런 나의 진심을 이해해 주었고.


다만 일상생활에서의 은혜를 나누는 그들의 방식과 달리 나의 '나눔'은 이야기가 아닌 언제나 토론에 가까웠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설명엔 가감 없이 전도사님의 말씀이 반드시 옳은 것 같지는 않다며 의견을 냈고, 아마도 그럴 때마다 셀원들은 때로 불편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도 꾸준히 예배를 보러 오는 나를 신기해하는 면이 더 큰 것 같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아내와 처음 관계에서 삐걱이던 시절의 가을날 하루에 나는 어김없이 주일 예배를 참석했다. 청년부 예배는 일반 예배와 달리 찬양 공연을 먼저 30분 정도 하고 목사님 말씀을 듣고, 다시 찬양과 기도의 시간을 듣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그때 목사님 말씀의 주제는 '길을 잃었다고 주저앉지 말라' 였던가 그랬다.


말씀을 마치고 찬양팀의 노래가 흘러나오던 때, 여전히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내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오면서 나는 그때 울었다. 그 당시의 나는 아내와 간신히 관계의 시작점을 잡아가기로 한 상태였는데, 시작은 했지만 잘해나갈 수 있을까, 장거리 연애가 나에게 맞을까 하는 고민을 하던 시기였다. 그런 힘든 마음에, 그 찬양은 나를 분명히 파고들어 두드렸다.


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 그때의 눈물은, 그 울림은 내 나름대로의 '은혜받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비록 여전히 믿음이 부족하고, 힘들 때 가장 먼저 찾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닌 내 앞에 놓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에 대한 나의 능력을 돌아보는 무신론자지만 말이다.


논리가 아닌 나의 경험으로, 그때의 나를 울게 만든 것은 분명히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의 마음을 두드리며, 감싸 안으며 괜찮다고, 다시 일어서서 가자고 말했던 무언의 목소리였음을 알기에 나는 이제 종교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에 얼마나 큰 울림이 자기 안에 있는지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무신론자다. 하지만 그날의 울림 이후로 내 안에도, 나만의 기도는 언제나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기도하는 남들의 모습에 예전에 의구심의 눈초리를 보냈다면, 이제는 그들의 기도에도 귀 기울이며 관심을 가질 정도의 포용력이 있다.


여전히 여러 핑계를 대며 주일에 교회를 가지 않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지만, 내 안의 믿음은 이제는 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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