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라는 이름 하에 감춰져 버린 희망
하루의 일과를 마친 채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을 마치고 나면, 현관 중문을 열었을 때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는 두 딸들과, 그런 나를 보며 두 아이와의 육아에 피곤하지만 반갑게 맞아주는 아내와의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벌써 내 하루는 잠들 시간에 이르게 된다.
첫째 딸을 재우기 위해 매일 잠들기 전 오늘은 몇 권의 동화책을 읽어줄까? 하는 건 이미 우리 둘 사이의 오랜 루틴이다. 한 권이라도 더 읽어줬으면 하는 아이와 한 권이라도 줄이고 싶은 나와의 치열한 경쟁은 보통은 아이의 승리로 끝난다. 그렇게 보통 네 권 정도의 동화책을 스스로 고른 아이가 "아빠 다 골랐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면, 우리의 꿈나라 여행길은 그렇게 시작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독서를 굉장히 좋아했다. 친구들과 나가 노는 것보다도 책을 읽는 걸 더 좋아했었고, 너무 집에만 있으니 부모님이 걱정한 나머지 책만 읽지 말고 좀 밖으로 나가라고 할 정도였다. 집 한켠에 책장이 우르르 늘어선 곳에 책만 족히 몇백 권은 있었을 거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동화는 소설이, 백과는 에세이나 전문서적이 되었고, 동화는 이제 너무 멀어진 장르였다. 그런 나에게 있어 동화를 다시, 그것도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줘야 하니 처음엔 참 곤혹스러웠다. 대부분 뻔한 주제와 권선징악의 결말이 현실과 너무 달라 좀 우습기도 했고.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동화책을 읽어 주면서 아이가 때때로 말하는 "아빠 너무 좋은 이야기야"라는 말이 내 가슴을 쳐오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었다는 핑계로, 내가 보려고 하지 않는 순수함을 여전히 아이는 갖고 있었다.
나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동화책은 글 표지에 있는 '산과 바다의 젤리'라는 동화책이다. 산 중턱에 사는 젤리를 만드는 문어 씨의 하루를 담은 책으로, 아침밥으로 미역 샐러드와 소금물을 먹고, 밖에 나갈 때는 몸을 적시기 위한 작은 먹구름을 머리에 쓰고 나가는 그의 일상을 보면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지는 기분이다.
동화책을 읽어 주며, 가슴을 치던 그 감정은 어른이 되어 잃어버린 순수한 마음이다. 그 감정은, 현실 속에 살아간다는 이유로, 현실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하루에도 많은 갈등과 싸움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는 감정이다. 사실은 그 갈등 중 대부분이 돌아보면 별 필요 없는, 소모적인 싸움에 불과했을지라도 말이다.
어른이 된 우리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잃어버린 그 순수함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 주변엔, 그런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좋게 이야기해 보면 풀릴 수 있다고, 나쁜 의미로 한 행동이 아닐 거라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들.
때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 치부하지만, 우리가 어릴 때 그토록 동경했던, 그러나 지금은 가지지 못한 그 동화 속 세계를 조금이라도 현실로 만들어주는 건 그런 사람들 덕분이다. 계산을 해야 하는 재무팀장인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 또한 동심을 품은 어른이 되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매일 넘겨지는 한 페이지마다 그렇게 잃어버린 나의 동심은, 아이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와 함께 채워진다. 나는, 오늘도 아이와 함께 읽을 책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