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서 배우는 시대의 변화
토종 한국인인 나와 토종 우크라이나인인 아내인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들은 한국인이자, 우크라이나인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살아본 적이 없고, 특별히 우크라이나 문화를 강요한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지만 핏줄이란 게 참 묘한 것인지, 어느 정도 자아가 형성되는 중인 첫째 딸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을 때마다 항상 우크라이나 사람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물론,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우크라이나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특별히 이중언어나 다중언어를 염두에 두고 육아를 한 건 아니었기에, 나와 아내는 서로 영어로 이야기하고, 나와 딸은 한국어로, 아내는 딸에게 우크라이나어와 한국어를 같이 쓴다. 그래도 아마, 세 언어를 같은 의미로 알아듣는 것 같긴 하다.
어릴 때는 이 말 저 말을 섞어 쓰다가 아이가 한국어를 주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은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원에 다니고부터였던 것 같다. 어린이집과 달리 어쨌든 작지만 정식 교육기관으로 시작하는 유치원에서는 정말로 '교과'수업을 진행하고, 선생님들의 발화량이 어린이집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이 늘었다. 그리고 같은 친구들도 이제는 다들 말문이 트인 때이기도 하고.
그렇게 아이가 한국어를 주언어로 이야기하지만, 때때로 감탄사로 영어나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걸 보며 지내고 있을 무렵, 어느 날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와 놀이터에서 잠깐 놀고 있을 오후에 나를 보며 소리쳤다. 아이가 가리키는 장소 끝엔 햇볕에 말라죽은 지렁이 한 마리가 있었고, 입을 가리며 딸은 한 마디를 던졌다.
"와 아빠 완전 징그럽다. 오마이 가스레인지"
표정이 일그러진 딸을 보며 나는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오마이갓이 와야 할 자리에 더 늘어난 뜬금없는 가스레인지. 당연히 요즘 애들이 쓰는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겠지만 너무 오랜만에 요즘 애들의 언어를 들으니, 순간적으로 정지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윤아, 그건 또 어디서 배운 말이야?"
"아빠 당연히 오마이 가스레인지지 이것도 몰라 왜~"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고 다시 미끄럼틀로 뛰어가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웃음 속 생각에 잠겼다.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구나.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며 자기 세대끼리의 말로 의사소통할 나이가.
스스로를 이제 적은 나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나이를 정통으로 체감하는 때는 역시 이렇게 내 자식이 정면으로 나에게 던지는 직구를 맞을 때다. 내 아버지께서 나의 언어를 이해하기 힘들어하셨듯이 나도 이제는 딸아이의 언어를 버거워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 아이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다르다는 사실은, 때로는 슬프지만 시간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경이로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그 흐름 속에 함께할 수 없다 하여 딸아이와 점점 멀어진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딸의 새로운 말 한마디와 문장 한 줄은 그 아이가 내 안에서 오롯이 세상 밖으로 뻗어 나가려 하는 힘찬 발걸음 한 자국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그 광경을 기쁜 마음으로 목도할 자격이 있는, 한 사람의 행복감을 가진 아빠라는 말에 더 가깝다.
세대가 다르다 한들,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한들 그것이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마음은 말이 아닌 사랑으로 통하는 것이기에, 나도 그래서 한 마디 딸에게 되돌려 줬다.
"진짜 오마이 가스레인지다. 집에 가자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