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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멈추지 않으면, 행복은 또 달아나 버린다

또 나를 걷잡을 수 없기 전에

by Karel Jo


나이가 들면 시간이 배수로 빨리 흐른다는 말을 예전에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데 어떻게 시간이 각자에게 다를 수 있다는 말일까. 나의 1분과, 다른 사람의 1분이 과연 어떻게 다르기에 사람의 시간은 각자마다 가치가 다르다 얘기하는 걸까.


지금도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모두에게 동등하며, 갓난아이의 1분과 곧 숨이 다할 사람의 1분의 가치는 그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고 아니고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어렴풋이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해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이 빨리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나 말고도 수많은 이름으로 나를 덧씌운 채로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학생일 때가 가장 행복하다.

유치원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일 때가 가장 행복하다.


우리는 행복을 말하기 위해서 시간을 자꾸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나이가 들수록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증거일 수도 있다. 마치, 인사이드 아웃 2에서 나온 기쁨이의 말처럼 '어른이 된다는 건 행복을 덜 느끼게 되는 건가 봐'라는 말같이.


왜 어른이 될수록 행복이 점점 멀어져야 할까?라고 하면 여러 가지 말과 이유가 나올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무엇보다 내가 매인 곳이 많아진다는 점, 다시 말해 '책임감'이 커지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단순히 누군가의 자식과, 나 자신으로만 살지 못하고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이, 조직의 장이, 부모가 되면서 나를 여러 갈래로 조각내야 하기 때문에.


지난 2년간 기분부전증을 넘어 우울증으로 내 상태가 악화된 것은 그 조각난 자신을 견딜 수 없던 내 자신의 한계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나는 매일매일 다르게 불리는 내 이름의 무게를 감당할 만큼 강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삶을 포기할 정도의 용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미련이 너무 많았거나, 아니면 그 정도의 여력조차 남아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반년간 글을 쓰면서 어느 정도 회복탄력성을 되찾자 항우울제를 중단하고 글쓰기를 통해 조각난 내 자신을 주워 담기 시작한 뒤, 내 스스로도 최근 들어서는 무심결에 행복하다는 말을 하거나, 웃음 짓기도 하던 걸 생각하면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과감하게 연결을 포기한, 잠시 멈춰 섰던 내가 있기 때문이었다.


멈추는 것에 대해 사람이 두려움을 갖는 건 당연하다. 내가 멈추는 사이에 저 멀리 시간이 가 있을까 봐, 아니면 미래의 나에게 지금 해야 하는 일을 그저 떠넘기는 것에 불과할까 봐. 또는, 그렇게 멈추게 되면 스스로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까 봐 하는 여러 불안 속에, 잠시 멈출 용기는 쉽게 사그라들곤 한다.


그러나 실상은, 놀랄 만큼 별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내가 멈춰 선다고 세상이 다 같이 멈추지 않기에. 잠시 멈추고 충분한 회복의 기간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면 시간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기다려 준다. 바쁠수록 쉬어가라는 그 말은, 쉽게 잊히지만 반드시 잊어서는 안 될 삶의 지혜와도 같다.




요즘에 들어서는 또 내 체스판 위에 너무 많은 생각과 폰이 올라와 있나 싶을 정도로 살짝 버거움이 느껴진다. 회사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이 매일 다른 이유로 나를 찾을 때나, 갑자기 아픈 아이를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때에 듣는 조직변경에 대한 이야기 거나, 순간적으로 목까지 차오른 부담감이 나를 몇 번이고 짓누를 뻔한 적도 있다.


예전의 나라면 이도저도 못한 채로 그저 시간이 나를 앞으로 밀어주기만을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춰 서야 함을 안다. 미래의 내가 감당할 게 더 많아질 거라는 걱정이 여전히 들기는 하지만. 과감하게 멈추고 눈앞의 딱 하나에만 집중하여 지금의 어지러움을 돌파하는 게 더 효과적일 거라는 걸 알기에 나는 이제는 멈춰 설 수 있다.


물론, 행복의 역치가 아이 때에 비해 높아진 것도 사실이라 지금 멈춰 선다고 해서 행복에 겨울 거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 앞을 지나쳐 멀리 가려는 행복에게 너도 잠시 앉아 쉬어 가자는 메시지는 던질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멈추지 않으면, 저 행복도 나를 돌아보지 않고 자꾸 앞으로만 가려고 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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