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힘들 수 있는 쉽지 않은 경험
역삼동에서 여의도로 근무지를 옮긴 지도 어느덧 벌써 3개월도 더 지난 일이다. 평범한 경기 남부에 거주하는 프로 직장인답게 출퇴근 루트를 최적화해 봐도 가는 데만 족히 두 시간은 써야 하는 장거리 여행을 매일 하고 있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하다 보면 또 적응이 된다. 하루에 글을 쓸 수 있는,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고.
그래도, 일이 많이 몰리는 결산 주간이라든지, 새로운 견적을 제출하기 위해 숫자와 많이 씨름해야 하는 날은 그저 앉아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새하얗게 불타버린다. 지친 몸으로 퇴근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데다 먼 거리의 충격이 더해지니 그런 날은 퇴근 후 소파 위의 껌이 되어 내려올 줄을 모르게 된다.
그날도 그렇게 어느 힘든 날 중 하나였다. 호주 지역의 새로운 고객사에게 대량구매에 대한 제안을 협의하기 위해 제품의 원가와 가격을 종합해 합리적 마진 수준을 검토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수량과 마진 사이에서 수많은 시나리오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지친 나는 대략적인 그림을 마무리 짓고 퇴근 후 소파 위에 붙어 있었다.
아직 걸을 줄만 아는 둘째는 내가 누워 있어도 옆에 와서 배시시 웃는 것 말고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첫째는 오늘 자기의 하루를 조근조근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유치원에서 누구와 같이 놀았는데 어땠다느니 하는 말을 하다, 문득 아이가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아빠, 아빠는 몇 살이야?"
"음... 내년에 만으로 40이 되지?"
"우와 많다. 나도 아빠처럼 되고 싶다"
"네가 아빠처럼 되면 아빤 할아버지가 될 텐데~"
할아버지라는 말에 반응한 걸까, 아이는 내 옆머리를 주섬주섬 손으로 훑더니 나지막이 한 마디 던지고는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아빠가 나이를 안 먹었으면 좋겠다"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아이고 힘들다'라는 말이 내심 걸렸던 걸까, 아니면 어느새 짙어진 옆의 흰머리가 불쑥 묘해 보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나도 모르게 저녁시간에 종종 잠들어 버리곤 하는 그 모습이 아이에게 가여워 보였을까.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었다. 아마도 아이에겐, 나도 모를 순간에 나이 들어가고 있는 나의 모습이 무던히도 서운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어렸을 적은 솔직하게 잘 기억나지 않고, 기억이 아직 성한 중고등학생 때는 나는 그렇게 살가운 자식은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서야 아버지와 골프도 같이 치고, 가끔 소주도 한 잔씩 하곤 했지만 그전에는 좋게 봐도 통화도 잘 안 하는 무뚝뚝한 아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부모님도 내가 어릴 때 이런 말을 듣고 행복과 사랑을 느끼셨을까.
사랑을 서투르게 배운 나였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1년 이상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었기에 나는 나와 달리 아이는 사랑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랬다. 방법을 몰라 그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었지만, 사실은 내가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닌, 여전히 나는 사랑을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잃고 싶지 않아 하는 이 어린아이의 눈으로부터.
단단하게 살아보려 해도 시간이 점점 흐르고 사회적 위치가 굳어질수록, 내 앞에 붙는 다른 이름들이 더 많아질수록 솔직하게 인생을 살아간다기보다는 살아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날이 더 늘어만 가곤 한다. 조금 더 힘을 빼고 치열하지 않으려고 해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또는 나의 불안함은 때로 나를 멈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아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나를 조금 더 천천히 늙어가게 할 것이다. 겉모습으로 보이는 흰머리나 빠지는 탈모를 막는, 외형적인 나이 듦이 아닌 마음이 나이 듦을 늦춰 볼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아이에게 내가 사라져 간다는 불안감을 훨씬 뒤에나 다시 가질 수 있게, 오늘도 나는 받은 사랑에 행복해하며, 잠든 아이를 쓰다듬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