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에 누워서 하늘을 본다는 것의 쾌감
비가 많이 내렸다는 중부 지방의 소식이 마치 다른 나라 뉴스인양, 한 주 동안 머물렀던 제주도의 날씨는 쾌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섬 날씨의 특성상 바람이 세게 불 때도 있었고, 쨍하게 맑은 하늘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여우비도 종종 오곤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그저 맑은 날씨에 제주를 만끽할 수 있었다.
팀장이 되고 난 후, 결재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쉬어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시스템이 잘 갖춰진 회사면 대결권이 잘 정립되어 결재권자가 휴가를 가도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내가 다니는 곳은 그렇지 못하다.
외국계 특유의 융통성 없는 프로세스까지 겹쳐 사실 대결을 내리고 가기도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휴가 중이라고 하더라도 가끔 폰으로 회사 포털에 접속해 이른바 '승인 타임'을 해야 하기 일쑤였고, 아내도 처음엔 그런 나를 보며 곱게는 안 보다가, 나중에 익숙해지고 나니 짧게만 하라며 별 신경을 안 쓰는 지경이 되었다.
이번 휴가는 그래도 일부 시스템에 대한 권한은 밑으로 대결권을 지정하고, 미리 하루에 점심/저녁으로 두 번 결재문서를 확인하겠다고 관련 팀에 공지를 하고 가서인지 결재를 올리자마자 긴급하게 승인버튼을 눌러달라고 요청하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아내가 웬일로 결재한다고 폰을 안 보냐고 물어볼 정도로.
물론, 5살 아이와 18개월 아이를 데리고 여행하는 이상 그 여행은 더 이상 힐링이 될 수 없다. 그래도 둘째 정도면 까탈스럽지 않고 비행기에서 울지도 않고 이륙하자마자 소르르 잠드는 남들 눈에는 아주 순하고 편한 아기였지만, 원래 자식들이 남의 앞에서는 순한 아기를 연기하는 순간이 있다는 건 부모라면 한 번씩 다 겪는 일 아닌가. 우리는 그렇게 우리보다 아이들을 더 챙기며 집안일을 잠시 잊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하고 여행을 마쳤다.
그래도 나와 아내는 이번 가족여행 중에 서로 한 마음으로 최고의 힐링 포인트를 겪었다. 바로 리조트 수영장에서 겪은 짧은 10초간의 시간.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에겐 여행을 가면 호텔보다는 리조트가 여러 모로 편하다. 방도 넓고, 아이들이 층간소음에 신경 쓰지 않고 조금은 뛰어도 되며 간단한 조리기구가 갖춰져 있어 입맛이 없으면 방에서 대강 해결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서귀포에 있는 켄싱턴리조트에 묵었는데, 야외수영장이 딸려 있어서기도 했다.
둘째 날 첫째 아이가 좋아하는 헬로키티 아일랜드에서 이런저런 구경도 하고 사진도 잔뜩 찍고 점심쯤 돌아와 우리는 오후 내내 야외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18개월인 둘째에겐 첫 물 체험이었는데, 누가 물병자리 아니랄까 봐 물 안에서 나올 줄을 모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와 아내도 굉장히 흡족했다.
번갈아 가며 첫째와 둘째의 튜브를 밀어주던 차에 아내는 나에게 잠깐 깊은 풀에서 수영하고 오겠다고 말했고, 아내가 수영을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맘 편히 하고 오라고 손짓했다. 잠시 뒤 돌아온 아내는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도 갔다 오라 하였지만, 물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던 나는 그냥 물 위에 누웠다.
그리고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본 그때, 내 눈에 펼쳐진 건 구름 몇 조각이 야자수잎 사이로 흐르고 있는 청량한 제주의 하늘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마치 시간이 멈춰 흐르는 느낌을 받으며 머릿속에 그때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쉬지 않고 나를 찾는 회사 연락도, 놀아달라며 웃으며 달려드는 아이들도,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와 그 하늘 사이 외에는.
생각해 보면, 단순히 누워서 하늘을 본다는 행위 자체를 해 본 적이 언제였을까 싶다. 아마도 대학생 시절, 교내 호수 근처 풀밭에서 강의 쉬는 시간에 잠깐 누워서 쉬던 그런 때 말고 사회인이 되어서 바깥에서 누워 본 적이 있었나? 그러나, 누워서 하늘을 보는 행위는 분명 파괴적이었다. 그 시간은 짧았지만, 순간적으로 머릿속의 잡념을 싹 지울 만큼의 청량함만이 감돌았다.
그러다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니 온통 현실이었다. 두 딸들은 '아빠 누워있었어~'라고 외치며 튜브를 이끌고 달려들었고, 쉬는 시간에 폰을 확인해 보니 몇 건의 메일이 또 와 있었다. 그러나 놀랄 만큼 마음을 짓누르던 부담감은 사라진 채였다. 모든 게 부질없다는 공허함에서 오는 것이 아닌, 다 괜찮다는 근거 없는 충만함에서 오는 가벼움으로.
잘 쉰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어려운 질문이다. 충전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니 어딘가 새로운 장소에서 낯선 이끌림으로 충전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아무도 찾지 않는 동굴에서 며칠 사라져 있어야만 힘을 얻는 사람도 있다.
나나 아내도 그리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니, 사실 쉰다고 하면 밖에 가지 않고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선호한다. 여행지도 뭔가 액티비티가 많은 것보다는 경치 좋은 곳에서 크게 동적이지 않은 장소를 더 좋아한다. 아이가 생기면서 어느샌가 쉰다는 개념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양보다는 질이라는 걸 알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또다시 여러 문제들이 나를 복잡하게 할 것이다. 아이들은 하루 달리 커가며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놀라게 하고, 회사에선 누군가의 리더로, 누군가의 팀원으로 끊임없이 나 자신을 검증하기 위한 시험대에 올라야 한다. 브런치 글쓰기로서도, 언젠가 쓰고 싶었던 주제를 이제는 찾아 정리해야 한다는 누구도 시키지 않은 압박감도 들기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겪은 10초를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때때로 내가 벅차진다면 용기 내어 잠시 멈춰 서서 누워서 하늘을 보려 시도할 것이다. 세로로 선 세상이 아닌, 세상을 가로로 보며 또다시 하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이야기로 복잡한 삶을 다시 힘차게 헤쳐나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