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같이 내 손에 붙는 기묘한 반어인
나와 아내는 결혼한 후로 어쩌다 보니 코로나 시기를 빼면 매년 제주도에 여행을 가고 있다. 갈 때마다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는 우리가 그래도 한 장소만큼은 빠지지 않고 반복적으로 찾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안덕면 중턱에 있는 헬로키티 아일랜드다.
비록 나는 그 많은 산리오 캐릭터 중 알고 있는 게 헬로키티뿐이었지만, 사실 헬로키티 말고는 산리오라는 브랜드 이름 자체를 아내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매년 동심에 젖은 아내의 표정과 시나모롤 사이를 뛰어다니는 첫째 아이를 보면 방문 첫 행선지로 잡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내는 예전 글에서도 한번 다루었지만 딸들이 좋아하는 메이저 캐릭터가 아닌, 초록색 반어인인 한교동을 좋아한다. 다만 아쉽게도 여태까지 헬로키티 아일랜드는 메인 캐릭터들 위주의 전시만 해왔지 한교동은 전시에서도 논외였고, 굿즈 판매에도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였다. 아내는 축 늘어진 표정과 멍한 눈을 좋아하지만 솔직히 객관적으로 마이너한 취향 아닌가.
이번 여름휴가에도 여지없이 우리는 헬로키티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개관 10주년 기념일 같은 것인지 곳곳에 10th Anniversary라고 꾸며진 캐릭터들을 볼 수 있었고, 작년에 왔을 때와 달리 거의 대부분의 전시실을 리모델링했다.
헬로키티뿐만 아니라 산리오 캐릭터즈를 동반한 놀이동산 같은 느낌으로 전시실을 꾸며놔서, 아이들도 아내도 몹시 만족하며 새로운 느낌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특히 다른 캐릭터를 처음 본 둘째는 19개월 아기가 뭘 안다고 폼폼푸린 옆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물론 그렇게 리모델링한 장소에서도 한교동은 메인 캐릭터는 아니었기에 한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영상 전시실 어딘가에 간혹 등장하는 얼빠진 모습이 나올 때마다 아내는 소녀같이 기뻐하며 사라지는 영상을 카메라로 잡아냈다. 그러다 전시실이 끝나고 새로 생긴 뽑기 코너에 갔을 때, 참새가 방앗간을 지날 수 없는 것처럼 첫째는 "아빠 나 뭐 하나 뽑고 싶어"라고 말하며 뽑기 기계를 두리번거렸다.
수많은 기계가 있었지만 한교동 피규어가 나오는 경우의 수는 유령 분장을 할 캐릭터 뽑기 뿐이었다. 그마저도 딸이 아기 산리오즈에 더 관심을 가져 동전을 넣고 드르륵 돌려 포차코와 쿠로미가 나오니 만족하고 색칠놀이를 하겠다고 뛰어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아이를 따라가는 아내의 눈길 끝에 아쉬움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뽑기 하나에 3천 원이나 하니 쓸모도 없는 피규어 같은 거에 큰돈을 낭비하기 싫다는 엄마의 마음과, 아직 동심을 채 잃지 못해 갖고 싶은 걸 아쉽게 참아야 하는 소녀의 마음이 공존하는 눈빛이었다. 아내가 아이들의 색칠놀이를 도울 동안, 아내의 남자로서 나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조용히 유령놀이 뽑기 기계 앞으로 가서 나는 숨을 골랐다.
이것은 운이다.라고 생각하며 동전을 차곡차곡 넣고, 레버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드르득, 어쩐지 빡빡하게 움직이지 않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한번 더 돌렸다. 돌아가지 않는 레버를 보고 '고장 난 건가?'생각하고 당황했지만, 한번 더 마지막으로 힘을 썼다. 투둑, 하고 동그란 플라스틱에 싸인 캐릭터가 나왔다. 이제, 운명의 시간이었다.
조심스레 껍질을 까고 나오자, 거짓말같이 유령 보자기를 뒤집어쓴 한교동이 나왔다. 뽑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16%, 6개 캐릭터 중 1개였으니 가챠로서는 높지만, 1회로는 운을 걸기 어려운 수치였다. 운명이 나와 함께했음을 확인한 순간, 나는 웃음을 감추고 손바닥에 반어인을 숨기고 아내에게 갔다.
"Tell me that you Love me"
"뭐야 갑자기? I Love you"
황당해하는 아내가 사랑한다 말하자 나는 아내에게 손바닥을 펴 유령 한교동을 보여주었고, 아내는 깜짝 놀라며 "How???"를 연발했다. 아내가 사고 싶어 했던 가방이나 뷰티용품을 사줬을 때보다 그 어느 때보다 기쁨과 놀람이 가득한 표정으로 아내는 그 작은 눈을 한 반어인을 잡아들었다. 이내 수줍은 표정으로 고맙다고 하는 아내를 나는 그저 다독일 뿐이었다. 오늘의 행복을 책임졌다는 성취감과 함께.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던 아내에게 결정타를 날릴 수 있던 계기는, 이디야 커피에서 음료를 사면 산리오 랜덤 피규어 키링을 살 수 있다는 광고였다. 또 남은 건 한교동, 포차코, 케로케로피 세명 중 각각 2개로 중복을 감안하면 셋 중 하나, 중복을 생각하면 또다시 16%였다. 어쩐지 그날의 나는 운명이 함께하는 것 같았기에 나는 과감히 음료 두 잔과, 키링 두 개를 구매했다.
키링을 사 온 나를 보자 아내가 너 오늘 작정했구나,라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고, 나는 또 한 번 증명해 냈다. 6개 중 중복 없이 한교동만 골라 뽑아버린 그날, 아내는 순식간에 한교동 피규어 군단에 3개를 추가할 수 있었다. 3개를 뽑기 위해 걸린 뽑기는 단 3개, 이쯤 되면 한교동은 운명과도 같이 내 손에 붙는 캐릭터인가 싶었다. 마치 내가 한교동이고, 한교동이 나인 것처럼.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늘어난 캐릭터를 일렬로 죽 늘어놓으며 아내는 미소 짓고 "아빠 완전 금손이야"라고 말하며 딸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첫 한교동을 아내에게 가져다주며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다면, 이제 어쩐지 나는 한교동과 나 사이에 이어진 무언가의 운명을 믿기 시작했다. 언젠가 일본에 갈 일이 생겨 산리오 캐릭터샵에 가게 된다면, 이제는 내가 먼저 나의 분신인 이 반어인을 찾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