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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지 않은 나의 하루를 소개합니다

수면 밑에서 올라와서 보는 풍경

by Karel Jo


아침 여섯 시 정각, 매일 맞춰 놓은 알람소리가 한 번 울릴 때 나는 잠에서 깬다. 잠귀가 밝은 나는, 알람소리를 세 번 이상 울리게 뒀던 적이 없다. 혹시 몰라 맞춰 둔 10분 뒤 알람도 다음날로 미뤄놓고 일어나면, 찌뿌둥한 몸에 잠시 기지개를 켜며 침대를 갠다.


회사를 가기 위해 세수를 하고, 전날 둘째 아이가 밤 사이에 먹은 젖병을 씻고 가방을 둘러메고 나오면, 찌는 여름날의 공기가 코를 찌른다. 아직 전날의 열기가 채 가시지 못한 채, 잔열을 머금은 아파트 아스팔트 도로 위를 지나 버스정류장에 가면, 나처럼 서울 출근길에 나서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아침 일곱 시, 버스가 서울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전날에 온 회사 이메일을 읽어본다. 외국계 회사의 특징상, 시차가 맞지 않아 유럽과 미국에서 종종 메일이 오가기 때문이다. 그날 봐야 할 업무를 대략적으로 머릿속으로 정리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모든 일이 나를 향하고 있는 기분 속에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향한다.


아침 아홉 시, 꼬박 지하철을 타고 1시간 반 만에 도착한 회사엔 이미 출근해 있는 동료들이 있다.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이런저런 회의에 불려 가기 시작하는 동안 이메일함엔 결재 요청이 쌓여만 간다. 짓눌러진 돌처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기계적으로 마우스를 클릭한다. 승인, 승인, 반려, 보완요청. 이렇게 결재해도 되나 싶지만, 아무래도 좋지 않나.


저녁 여섯 시, 집으로 가는 버스를 지금 타지 않으면 1시간 반 이상 걸리는 퇴근길이 될 수도 있다. 못다 한 일은 집에서 한다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접고 회사를 나와, 아침의 반대로 퇴근을 하는 길에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누워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지만, 퇴근길 현관문을 열면 두 딸이 나에게 달려온다.


저녁 여덟 시, 뭔가 대강 먹고 난 후 아이들이 앞뒤로 안기며 달려드는 시간을 대강 보내고 나면 어느새 아홉 시가 넘어 재울 준비를 하게 된다. 첫째 아이를 양치시키고, 나도 간단히 씻고 아내에게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하고 내 방 침대에 누우면 어느덧 밤 열한 시, 미뤄둔 일이 생각나지만, 다시 노트북을 열 용기는 나지 않는다. 어차피 여섯 시간 뒤면 또다시 눈을 떠야 한다.




아침 여섯 시 정각, 알람소리에 눈을 떠서 일어난 뒤, 기지개를 켜고 블라인드를 다시 열어놓으면 전날 비가 내렸는지 조금 젖은 하늘이 보인다. 오늘은 날이 조금은 그래도 시원하려나? 간단히 씻고 나와 안방에 들어가니 아내와 두 아이는 잠들어 있다. 간밤에 둘째 딸이 웬일로 젖병을 두 번이나 먹은 게 보인다. 힘들었을 아내를 생각하니 안쓰러워, 얼른 젖병을 씻고 간단히 마룻바닥에 어질러진 어제의 장난감들을 정리하고 출근길에 나선다.


일곱 시, 버스가 도착해 사람들을 태우고 달리는 도로 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들어 있거나 쇼츠를 보며 시간을 때우지만, 나는 보통 글을 쓰면서 어제 하루를 정리하고, 오늘 하루에 대한 새로운 다짐을 써 내려간다. 나와 대화하는 것은 마치 큼지막하게 지어진 도서관에서 노는 기분으로, 언제나 대화거리가 끊이지 않는 기분이다.


아홉 시, 사무실에 도착하니 동료들이 "먼 길 오셨네~"하며 아침 인사를 건넨다. 적응해서 괜찮다는 몇 마디를 나누고 자리에 앉으니 마치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는 듯이 몇몇 사람이 내 자리에 와서 어떻게 처리해야 좋겠냐는 의논을 하기 시작한다.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정확하게 정리해주고 나면, 역시 깔끔하다는 감사 인사에 가끔 간식거리를 나눠 받기도 한다.


점심시간에 사무실 밖을 나오면 햇빛이 이미 쨍하다. 팀원 중 한 명이 칭찬을 세 가지 해주면 양산을 씌워드리겠다는 농담을 하자, 내가 던진 맥락 없는 칭찬에 서로 웃으며 식당에 도착하고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들고 들어오면 시원한 사무실 공기에 안도하며 오후 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오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업무 루틴을 마치고 팀원들에게 먼저 내일 보자며 늦지 말고 들어가라는 인사를 하고 가는 퇴근길에는, 서울에서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수많은 경기인들이 빼곡하다. 불평불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오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음악을 들으며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연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아내가 말하는 "아빠 왔다~"라는 소리에 두 딸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내 품에 안긴다. 두 명에게 뽀뽀를 해주고 나면 지친 얼굴로 서 있지만 웃는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수고했다며 안아주고 토닥이며,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내 무릎에 앉는 둘째와 주변을 빙빙 도는 첫째 아이와 온 마음을 다해 놀아주는 시간을 가진다.


아이들이 잠든 후, 아내가 잠시 나와 짧게라도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며 우리의 하루를 나눈다. 그러다 둘째가 뒤척이면 화급히 뛰어들어가 다시 재우며 내일을 약속하고 사랑한다는 말로, 그렇게 하루를 저물어낸다.




타임슬립으로 유명했던 어바웃 타임 영화도 그렇고, 하루를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를 다룬 말들은 많이 있다. 이 글 또한 그 틀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내가 무게를 두는 점은, 전자는 내가 아직 기분부전증이 심해져 우울증을 앓고 있을 때의 하루, 후자는 그를 이겨내고 회복 중에 있는 최근 일상의 하루라는 점이다.


괴로워했던 그때와 지금의 일상이 다르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장소에서 일하고, 같은 시간대에 돌아와 하루를 마친다. 특별하지 않은 하루에 특별함을 부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울증이 극심할 때와 지금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하면, 나는 그 차이가 주변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의 차이라고 느낀다.


스스로를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고, 점점 더 쓸모없어지는 자신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던 날들이 있었다. 주변에서 하는 말들은 모두 의미 없는 말이고,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는 철저한 고립감에 시달리던 날들. 나는 하루의 전부를 내 안에 갇혀 살았다.


약물 치료를 중단하고 심리상담 대신 글쓰기를 시작하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지 반년이 지난 지금, 확실히 스스로도 달라짐을 느낀다. 이제 나의 삶은 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내 주변에 원래부터 있던 타인과 자연을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언제고 또 악화될지도 모르는 숨겨진 위험은 여전히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겨낼 방법은 알고 있다.


이 글은 특별히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이겨냈다는 경험을 풀어내기 위함도 아니다. 다만, 혹시 지금 어디의 누군가가 마음이 힘들다면, 그저 그 한 마디로 말하고 싶다. 특별해질 필요 없이, 수면 위로 조금씩이라도 올라오면 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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