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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약속이 취소되면 기쁘다

MBTI보다 더 복잡한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by Karel Jo


예전에는 사람 성격을 파악할 때 혈액형으로 선입견을 갖곤 했다. A형은 소심하다. O형은 털털하다. B형은 특이하다. 그리고 AB형은 천재 아니면 바보라는, 대강 생각해도 전 세계의 사람을 4등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걸 믿어왔다. 이걸 남녀로 갈라 A형 남자와 B형 여자의 궁합이 좋다는 등 4가지 유형 갖고 참 수많은 조합을 시도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MBTI가 등장했고 사람의 성향을 무려 16가지로나 정의하는 이 심리검사는 과거의 혈액형을 단숨에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을 16개 유형에 박아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게으름의 P, 냉혈한 T, 공상주의자 N등 각각의 알파벳이 반드시 그를 상징하는 것만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혈액형보다 더한 선입견으로 사람을 정형화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나의 MBTI는 INTJ로, 통상적으로는 굉장한 '냉혈한'으로 알려져 있다. 콧대가 높고, 언제나 타인을 볼 때 깔아보는 습관이 있으며, 체계적인 사고와 미래지향성이 강한 동물 애호가들. 마지막에 동물 애호가라는 점만 빼놓으면, 나 스스로도 특별히 그 세간의 평가가 나 자신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여러 검사를 해 봐도 나는 성격의 성향이 꽤 극명하게 나오는 편이다. 외향적보다는 내향적이 80% 가까이,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성향이 역시 70%, 논리와 통제는 둘 다 90%에 육박할 정도로, 경계선에 걸칠 것 없는 INTJ 자체와 같은 사람이다.


물론, 사람이 성격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INTJ로서의 내면을 가리고 페르소나를 하나 장착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Commercial Finance 팀의 팀장 역할을 수행하기에 몹시 많은 애로점이 있었을 것이다.


Commercial Finance는, 일반적인 재무회계팀의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Commercial, 즉 영업조직이 어떻게 하면 더 영업활동을 통해 회사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한 재무적 판단이 필요한 팀이다.


바꿔 말하면, 숫자를 단순히 숫자로 읽지 않고, 그 숫자가 사업의 어디에서 기반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사업 전반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필연적으로, 사업의 정보는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얻는 것이 가장 빠를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가장 주된 카운터 파트너는 언제나 영업이다.


그러나 약속이 있어도 그 약속이 취소되면 더 즐겁고 행복감을 느끼는 전형적인 내향인인 나에게, 이 외향적인 팀의 팀장을 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년 동안이나 직장 생활을 해 왔으니 어떻게든 잘 어울리는 척은 할 수 있지만, 최근 들어 벽을 느끼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천성적으로 성격이 밝으신 분들이 있다. 성격이 밝다는 표현보다는 타인에게 으레 쳐져야 할 개인과 개인 사이의 장벽이 없는 분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옳겠다. 그런 분들은 내가 저 멀리에 가만히 있어도 어느새 주변에 다가와, 분명 높게 쳐놓은 장벽이 있었음에도 그걸 아무렇지 않게 깨부수거나, 또는 '이게 있었어?' 나 '이게 뭐야?'라는 반응으로 그 장벽을 성큼 넘어 나를 한바탕 휘저어 놓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린다.


팀장이 되기 전에는 이런 분들을 그냥 피하면 됐었다. 내가 무언가를 결정하는 입장이 아니었고 나는 현상을 잘 정리해 윗선에 주로 '보고'를 하면 되는 역할이었기에, 그런 불편한 분들과 마주해야 할 의무는 나에게 없었다. 나는 그 지뢰를 잘 피해 내 할 일만 잘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팀장이 되고 난 이후부터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한 번 있었다. 마케팅 관련 업무를 담당하시는 분이었는데, 곁에 있기만 해도 소위 '기 빨리는' 기분이 드는 분이라 가급적 그분이 올리시는 결재요청이나 업무 관련은 꼼꼼히 보되 질문을 최소화하면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나 말고 팀원들과는 모두 원활한 관계를 가지신 분이라 가끔씩 우리 팀 자리로 찾아오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보통은 잠시 물을 뜨러 가거나 하며 사라지곤 했지만, 그날따라 다른 동료와 논의할 일이 있어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분은 나에게 과자를 권했고, 나는 거절했다. 하지만 그분은 나의 "괜찮습니다"라는 표현이 "감사합니다"로 들렸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자리에 과자를 놓고 가셨다.


악의 없는 행동이고, 기분이 나빴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내 마음 안의 공간을 들어왔다 나갔다 하시는 그 순간에 나는 내향인으로서의 기력이 소모되면서 자연스럽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고, 팀원들은 나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몹시도 즐거워했다. "그래도 우리가 낫죠? 우리 정도면 조용하죠?"라고 나를 더 힘들게 하는 질문을 재잘재잘 던지면서.




물론, 팀장의 입장에서 이런 일에 하나하나 힘들어하기 시작한다면 팀장 역할이란 진작에 포기해야 하는 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나와 너무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이 버겁다. 그들이 무례해서가 아니라, 내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방향에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을 불편해했던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 자신의 미성숙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안의 성향을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되, 그것에 갇히지도 않기를 바란다. 상대를 불편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나를 더 정제해 그 안에 여백을 만들어 보려 한다. 그렇게, 오늘도 조금씩 나를 확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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