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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it be, 지혜의 말씀 한마디에서

태풍은 맞는 것이 아니니까

by Karel Jo


그런 날이 있다. 차올랐다라고 느끼는 날. 모든 것이 어깨 위를 넘어 머리 위까지 침범해 올라와 있다고 느끼는 날. 표면장력으로 버티고 있다고 느낄 만큼 물이 한 방울이라도 더 들어오면, 그대로 버티지 못하고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 속의 평온함.


아마도 그 말이 맞았을 거다. 어른이 될수록 행복해질 수 없는 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사람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불행을 가져다주는 것도 사람이다. 그렇지 않았을까, 친구도, 사랑도, 동료들도, 모두 사람이 힘들게 하고 사람이 위로해 주는 걸.


기준점이 높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다. 나 자신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면 나를 칭찬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칭찬받을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 생각 자체가 무언가 뛰어난 일을 해야만 바쁜 부모님의 눈이라도 돌아보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마, 어딘가에서부터 엉켜 있을 거다. 아니면 왜곡된 기억 속에 살고 있는 건지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날들이 꽤 이미 오래 전인 것만 같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좋아졌다고 말하고, 지금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얘기한다. 내가 볼 수 없는 미래가 그들에게서 보인다. 정작 나는, 문 밖을 나서면 더없이 보이지 않는 어두움으로 다시 빨려들어가는 중인데. 힘들면 힘들어도 된다고 하지만, 결국 그 손은 내밀어지지 않잖아. 나는 그 하나로 소모된 감정인 것을.


사람들은 왜 그렇게 노력하지 않을까. 남 탓에서부터 출발하는 이 감정은 분명 나를 병들게 할 거다. 내버려둬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비틀즈가 말했던 그 말처럼, 나를 힘들게 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Let it be 해야 하는걸지도 몰라. 그들이, 비록 그런 무책임한 행동으로 나에게 피해를 준다고 할지라도.


외눈박이 세상에선 두눈박이가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 나는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에서 두눈박이일까 외눈박이일까. 누군가에겐 내가 세눈박이일수도 있다. 토해내지 못한 언어가 언제나 꽉 차있는 나는 다른 사람에겐 마찬가지로 평범하진 않은 사람으로 보일수도 있다.


두서 없이 쏟아내는 글은 오랜만이다. 10년 전에나 그랬을까, 그 수많은 시간이 흐를 동안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나보다. 어른의 길은 걸어도 걸어도 쉽지 않다. 이만큼이면 됐겠지 하는 순간 더 높은 해내야 할 많은 것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러다 거짓말같이 1주일 뒤면 아무 생각없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당장 연재하고 있는 글에는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또 담담한 문체로 나를 써내려갈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지금은 힘든 시기가 맞을 거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떨쳐내지 못한 잡념이 계속해서 재생산되어 머릿속 공간을 밀어내는 지금..


부디, 잘 버텨내어 지금의 부침도 어느 순간의 추억으로 어딘가에 기록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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