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무너지는 밤의 가장자리에서
지독하게 잠들지 못하는 그런 날의 밤이 있다. 하루의 피곤함을 뒤로한 채로 베갯잇에 머리를 대고 눕기만 하면 어느새 잠들어 있어야 하는데, 잠을 일찍 자기로 마음먹고 침대에 누운 날인데 그 하루의 모든 생각이 뒤엉켜 스스로를 마침내 옭아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순간이 있다. 마치, 뿌리 깊은 나무에서부터 올라온 나뭇가지 덩굴이 나 자신을 꽁꽁 싸매어 어디로도 갈 수 없이 눈만 깜빡이게 만드는 그런 상태.
그런 날에는 발버둥 치며 억지로 잠이 들기 위한 헛된 노력을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괜스레 야밤에 뜀뛰기를 해 보거나, 지루한 책을 펼쳐 억지로 한 장 한 장 넘겨 보거나, 따스한 우유를 데워 후루룩 들이키고 조용히 눈을 감아 봐도, 새까맣게 뒤덮여야 할 눈앞의 모습엔 초등학교 시절 누구나 해 보았던 검은 바탕에 긁어대는 스크래치처럼, 하루의 모든 기억이 끊임없이 재생되어 버린다.
그 말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어. 그보다 조금 더 낫게 행동할 수 있었을 거야. 그렇게 결론짓고 마무리지을 일은 아니었는데. 일이라도 조금 더 끝내고 왔어야 했을까, 그 사람은 나로 인해 또 안 좋은 추억을 가져갔을까. 지금 내가 괜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내 눈을 바라보던 내 아이의 마음을 보듬어주지 못하고 또 그렇게 재워 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스크래치로 새겨진 후회는 쉽사리 뒤덮이지 않는다. 그를 덮어내기 위해 더 많은 기억을 떠올리고 더 많은 기억을 억지로 뒤엎어 조각난 상처를 조금이라도 가려 보려 하지만, 결국엔 더 난장판이 된 누더기 같은 마음 조각만 남을 뿐이다. 되돌릴 수 없이, 다시 시작하려 해도 어디서부터 기워 나가야 할지 모르는 그 정도의 포기와 체념이 다가올 때쯤, 그제야 잠이 들 수 있다. 그 조금의 순간 뒤에 찾아오는 정기적인 아침 태양에 결국엔 여지없이 뜬 눈으로 지새운 채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겠지만.
체력에 조금 여유가 있었을 때에는 내 삶에도 아직 채 타오르지 않은 불씨가 조금은 남아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열기는 남아 있으나 더 타오를 것이 없는 새하얀 숯불 조각처럼, 그때 그때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잠시 열기를 내뿜어 보지만 여지없이 사그라든 채 불붙을 수 없는 값싼 하루살이의 열정만 남아 있는지, 이제는 손아귀에 힘을 넣어 쥐어 보려고 해도 잘 쥐어지지 않는다. 매너리즘일까, 아니면 번아웃일까. 어느 쪽이든 딱 떨어지는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삶을 전장에 빗댄다면 나는 언제나 승리를 위한 출진으로 정복해 왔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한 그 전장의 끝, 그를 위해 열심히 달려왔지만 능력의 부족이었을까, 아니면 환경이 미비했을까. 처음의 창대한 시작과 웅장한 진행에 비해 끝마무리는 언제나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올 뿐이었다. 이번엔 꼭 정복하겠노라고 떠나온 길을 되돌아올 때 몸이라도 하나 건사해 왔으면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의 출진은 승전을 위한 발걸음에 언제나 패전으로 기어들어왔다.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저 조금의 휴식만으로 무리한 진군을 해왔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러니 그 아쉬움에 오늘따라 유난히 잠들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아쉽기 때문에, 이제 군세가 다 갖춰져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정작 나의 힘이 부쳐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사실은 발 밑을 내려다보니 상할 대로 상한 나 자신과, 그리고 내가 이렇게 나를 돌보지 않고 앞다투어 나갈 때 나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의 수많은 작은 상처들 또한 보이기 시작하니 발걸음이 갑자기 무거워진다.
비록 나는 이렇게 잠들지 못한 채로 아침을 맞았지만, 곧 또다시 수많은 눈들이 나를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깨어 있는 나를 마주하겠지. 이미 나는 수많은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밤을 만끽한 채로 아침의 나를 맞을 테니. 어쩌면 오늘은 잠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왠지 틀림없이 그럴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