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가 되지 못한 사람의 10년, 그리고 배움
2011년 2월,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학사모를 하늘 높이 위로 던져 올릴 때, 나는 교수님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며 그렇게 말씀드렸다. 비록 지금은 잠시 돌아가지만, 언젠가 곧 다시 학문의 길로 돌아와 또다시 즐겁게 교수님과 말씀을 나눌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다리겠다고. 교수님 또한, 어디에 있든 중요한 것은 배움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니,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로 삶을 이어가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 이후로, 물론 내가 다시 그 상아탑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 그저 꿈만을 간직한 채로, 나는 한국에서도, 체코에서도 일단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저 마음 한 구석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다 미래에 공부할 나를 위한 초석이자 기다림이라 여기면서, 나는 점차 그렇게 직장인으로 인정받았지만, 직장인으로서 성공할 뜻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항상 사람이 원하는 것만을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구나 그렇듯 현실의 벽 앞에 나의 공부는 무너졌다. 세상은 의욕만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학문의 길이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이라고는 하나, 현실을 살지 않으며 학문을 해내기엔 안타깝게도 나에겐, 우리 집엔 가진 것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성공한 직장인이 되었다.
살면서 꿈이 직장인인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직장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체코어과에서 언어를 공부하면서, 언어학자로서 언어가 갖고 있는 힘에 대해 탐구할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각 나라에서 표준어와 사투리가 발달해 가는 과정이라든지, 한 나라에서 어떤 어휘들이 사어가 되어가는 과정이 한국과 체코가 어떻게 다른지 등, 나의 관심은 온통 언어였다.
그 관심사와 달리 나는 다양한 회사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해왔다. 인사총무 일을 하기도 했고, 생산관리 일을 하다가 원가계산을 하거나, 경영기획을 하거나, 지금의 Commercial Finance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거쳐간 다섯 개의 회사에서 모두 다른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다. 각자의 영역에서 제법 인정도 받은 덕에 팀장 역할을 받은 지도 어느덧 4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내가 이룬 성공은 나에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나의 성공을 그저 공부하지 못한 나의 기회비용으로 생각하고 나를 채찍질했다.
더 잘해야 한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이런 정도로는 한참, 아주 한참 모자라다.
고작 이런 정도로 만족할 거면, 공부하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나 안타깝지 않나.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건 나도 모르는 새에 어느덧 스스로를 좀먹고 있던 부전증의 어두운 한 측면으로 남아왔다.
그러던 지난 몇 주 전의 어느 일요일 저녁, 나는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습관적으로 내 이름을 말하면서 전화를 받는 나의 상대방에게선, 낯설지만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번호도 저장 안 하고 있었구나, 그래도 번호가 바뀌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에게 선생님이라고 스스로를 호칭하실 수 있는 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조금 당황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어느덧 20년이 훌쩍 넘어간 시간, 이제 와서 선생님이라고 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다 문득, 공부를 포기하기로 결심하며 체코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던 날, 그날부터 기억 저 편으로 묻어 버린 목소리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교수님이었다.
짧은 대화를 줄이자면, 한동안 동문회라는 개념이 많이 사라졌지만 올해 다시 오랜만에 학과에서 홈커밍데이를 진행하면서 동문들이 몇십 명 모여서 만나다 보니, 졸업생들이 잘 화합해서 후배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한 동문회를 살려 보자는 취지의 목소리가 모였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생업이 바쁘겠지만, 운영위원회로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냐는 말씀이셨다.
동문회나 종친회, 향우회 같은 조직에 요즘 들어 예전과 달리 그 위세를 잃고 있는 것은, 아마도 개인주의로 흘러가는 사회의 면도 있겠지만 후원금 등을 갖고 그들만의 파티를 하거나, 옳지 못한 방향으로 운영되는 일들을 너무 자주 접했기 때문에 인식이 나빠진 면이 더 클 것이다. 나 또한 조직에 대한 소속감이 지극히 적은 사람으로서, 그런 활동을 굳이 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평소에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수님의 그 통화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거절할 이유가 몇십 가지는 있었겠지만, 거절하지 못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해 보겠다.라고 말씀드리고, 동문회 재건을 자처하신 선배님과 통화를 한 뒤 홀린 듯이 위원회 단톡방에 스스로를 인사하게 되었다. 일사천리, 운명이 흘러가듯 나는 다시 학교의 그 시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생각보다 적절한 인원으로 구성된 위원회 명단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내가 체코에서 직장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을 무렵, 후배 중 한 명이 나와 같은 마음을 품고 체코에 공부를 위해 나왔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그때 약간은 좌절스러운 마음이었는데, 공부라는 것은 경쟁하는 것이 아니지만, 적어도 2,3년의 시간이 좀 더 필요했던 나와 달리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그 후배의 시작점이 그때는 꽤 조급하게 다가왔다.
그러다 결국 공부를 포기하고 돌아온 순간부터 그 이름을 잊고 살다가, 이번 위원회를 통해 다시 접하게 된 것이다. 문득 나는 궁금했다. 결국 그 후배는, 공부를 마치고 원하는 것을 얻었을까? 그리고 오랜만에 들어간 학교 홈페이지에서 작년부터 후배가 다시 학과로 돌아와 강단에 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긴 세월 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내가 포기했던 그 꿈을 그는 현실로 만들어 냈다.
후배의 이름을 곱씹으며, 나는 공부를 포기하고 돌아왔던 지난 10년간의 시간을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그 10년 동안, 사실 여전히 나는 스스로의 성공을 딱히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나의 모든 성공은 내가 원래 원했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보잘것없는 일이었고,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엔, 내가 현실에서 자유로워지는 그런 날이 온다면 무엇이 되었든 다시 체코로 날아가 뒤늦게라도 나의 꿈을 이루고 싶다. 공부하고 싶다. 갈망 속에 여전히 자신을 탐했던 그런 10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별 것 아닌 삶으로 치부하기엔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직장에서도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했기에 직책을 부여받고, 팀원들과 동료로부터 충분히 인정받고 나 자신의 필요성을 언제나 입증해 왔으며, 그 사이에 나 자신도 자신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을 꾸리고 또 아버지라는 책임감 속에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거울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 온 나 자신이 있었다.
결국, 내가 이뤄낸 것을 나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고 채찍질만 해 왔던 자신의 민낯을 비로소 마주하게 되자, 나는 그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설명하기 어려웠던 우울감이 조금은 씻겨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공부를 했어도 잘했을 나의 삶이지만, 지금 내가 이뤄낸 이 삶 또한 그렇게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다채로움은, 내가 칠한 이 도화지 위의 그림은 절대로 검지 않고, 그 자체로 그저 빛나고 있다.
물론, 지난 10년간 나 자신을 가혹하게 다뤄왔던 시간이 한 번의 깨달음으로 완전히 치유되고 씻겨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낮은 텐션으로, 기쁘지 않은 내 삶 속에서 즐거이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이제는 남에게 말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조금은 생겼다.
돌아보면, 한 번도 내 안에서 배움이 사라진 적은 없었고, 끊임없이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삶과 사람을 이해하며 시간을 보내왔다는 것.
나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나만이 써 내려간 하나의 문장이자 학문이었다는 것.
그리고, 더 이상 내가 해온 길을 나 스스로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이제는, 그렇게 조금은 알 것만 같다. 그리고 지금은, 그 배움을 더 충실히 이어가고 싶은 희망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