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익숙해지는 곳이 아니라 돌아가고 싶은 곳이었다

전쟁을 피해 온 어머니를 다시 보내야 했던 우리 가족의 선택

by Karel Jo


고향이란 어떤 느낌일까. 사전적으로는 단순히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의미하는 이 두 글자에 대해 나는 사실 살면서 어디가 내 고향이라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분명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군산이었으나, 나의 인생은 대부분 경기도 안산에 있었고, 비록 지금은 용인으로 터를 옮겼지만 삶에서 가장 강렬한 삶의 기억이 어디에 있었느냐고 하면 그건 또 20대 중후반을 바친 체코였다. 나는 이방인이었고,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고향이란 뭔가 딱 떨어지는 그런 정의로 남지 못했다.


힘든 고난의 길 끝에 장모님을 모셔온 우리의 삶은 기대했던 대로 몹시도 풍요롭게 전쟁으로 얼어붙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의 차가움을 서서히 녹여주고 있었다. 비록 코로나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여전히 바깥에 나갈 때는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벚꽃이 흐드러진 그 계절에, 우리는 퇴근 시간 후에, 주말에, 어느 날이든 우크라이나 3대가 모인 그 기쁨을 만끽하며 어디로든 떠났다.


장모님은 굉장히 활발하고 외향적인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땅이라는 이질감이 아직 못내 가시지 못한 듯 즐거워하셨지만, 어디를 가시든 조용히, 그리고 유심히 주변을 바라보셨다. 새로운 것들에 대해 크게 감탄을 표하시기보다는, 지금의 그 광경을 삶의 일기장 어딘가에 고이 접어두시려는 분처럼 그저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으며 가끔씩 멀리 하늘을 보시고 순간을 담아두시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국의 곳곳을 밟으며 추억을 한 층 한 층 쌓아 올려가고 있을 무렵,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잠들기 전 나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조금은 분을 감출 수 없이,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가 돌아가고 싶어 해.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아내를 가볍게 안아 주며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를 물어보았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사실 뭔가 잘 정리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 정말 일단 나올 수 있을 때 나오자는 마음으로 온 피난의 성격이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본가에서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장모님이 원래 살던 아파트와, 시골집의 가스, 전기 등이랄지, 그때까지는 살아 계셨던 아내의 외할머니, 장모님의 어머님이랄지. 우리는 장모님에게만 집중했고, 장모님은 본인의 삶이 아직도 거기에서 남아 계신 분이었다.


아내는 조만간 장모님이 나에게 직접 그 말을 할 거라고 했다. 내가 해 준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으시지만, 내가 집에 없으면 언제나 그 말을 반복해서 하고 계시다고. 곧 너에게 직접 얘기할 거라고.


그러던 어느 날의 퇴근길, 장모님께서 차려 주신 저녁식사 자리에서 결국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이제, 돌아가보려 하네."


장모님은 조용하게, 하지만 힘 있게 말씀하셨고, 아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얼굴을 감싸 쥐며 훌쩍였다. 나는 언젠가 올 거라고 마음먹은 상태에서도 심히 당황하면서, 장모님께 물었다.


"아직은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지금도 공격받고 있고, 몇 달만 더, 연말까지만이라도 조금 더 상황을 보는 게..."


장모님은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시면서도 말씀하셨다.


"알고 있네, 하지만 내가 여기에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씀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를 설득하고자 하시는 것도, 자신의 행동을 나에게 납득시키려고 설명하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장모님이 나에게 말하는 굳건한 의사 표현이었다. 한 사람의 성인이, 자신의 판단으로 인해 결정한 사실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나의 어머니라고 하면 더더욱이나.


물론, 나는 그 말에 그대로 순응할 수는 없었고, 비행기표와 여러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면서 생각해 보자고 시간을 그저 조금 더 뒤로 미룰 뿐이었다. 그러나 장모님께서 나에게 말한 그 시간 뒤로, 대화는 더욱 빈번하고, 거세졌다. 아내는 계속해서 이유를 찾으려 했고, 내 말대로 연말까지 조금 더 상황을 봐도 되지 않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렇게 가족에게 부담을 느끼느냐 물었고, 질문은 점점 구체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변해갔다.


“왜 꼭 가야 해요?”


어느 날 밤, 결국 조금 높아진 아내의 언성에 장모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입을 여셨다.


“내가 떠나온 집이 아직 거기 있다. 친구들도 있고… 내가 살던 거리도 있고… 내가 익숙했던 모든 게 거기에 있다. 나에게 고향은, 그곳이지 않니.”


아내는 고개를 저으며 눈물 섞인 소리로 말했다.


“여기도 이제 익숙해지실 수 있잖아요. 가족이 함께 살면 그게 고향일 수 있잖아요.”


“고향이란, 새롭게 익숙해지는 곳이 아니란다. 몸이 불편해도 마음이 편안한 곳이지.”


장모님의 그 말을 끝으로, 길지 않았던 그날의 대화 이후로 아내는 더 이상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점점 더 조용해졌다. 장모님과 마주 앉아 있어도,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웃지 못하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나는 그 사이에서 어느 쪽도 손을 들어줄 수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위험한 전쟁터로 다시 돌려보내야 하는 딸의 마음과, 내가 느끼지 못하는 고향이라는 곳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가진 장모님의 마음 모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의 말이 옳고 틀렸음을 따질 수 없는, 각자가 가진 삶의 이유에 대한 무거움과 가벼움의 문제였다. 경중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나 행복한 선택은 없다. 그리고 그 선택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저 존중과 안녕을 바라는 기도였을 뿐.


며칠 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 외에는 있지 않다고. 나와 당신의 고향은 지금 이곳이지만, 장모님은 우리가 결혼한 그날부터 자신의 고향에서 우리를 떼내어 다시 자신의 삶을 찾으신 분이라고. 아내는 쉽게 만족하고, 납득하지 못했지만, 나와 같은 마음으로 어찌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모든 게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장모님의 귀국날을 준비했다.


출국을 앞둔 마지막 주, 우리는 일부러 평소처럼 지내려고 노력했다. 아이는 여전히 외할머니에게 그림을 보여 주었고, 장모님은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 평범한 저녁들이, 다시는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출국 당일, 우리는 처음 장모님을 맞이했던 그 공항으로 다시 갔다. 그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우리가 보내는 입장이었다. 공항의 출국장에서 아내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마지막에야 장모님을 끌어안았다.


“조심해서 가세요.”


그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말들이 담겨 있었다.


장모님은 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다.”


그 말이 정말 괜찮다는 뜻인지, 괜찮아질 거라는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 셋과, 아무것도 모르는 첫째 아이조차 서로의 눈물로 마지막을 감싸안는 시간에서 그저 이 모든 것이 말 그대로 괜찮길 바랄 뿐이었다.


장모님은 마지막으로 우리를 한 번 더 바라보고, 천천히 출국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셨다.


그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 차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


아내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위기를 느끼는 듯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가지 생각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마도 그것이 고향이라는 말의 정의가 아닐까 하는. 우리가 아무리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곳으로 결국 사람은 돌아가고 싶어 할 거라는.


한 여름밤의 꿈처럼 흘러간 그 시간 뒤, 우리 가족의 시간은 그래도 생각보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내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정신력이 곧 무너질 거라는 것은 알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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