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를 거쳐 한국까지, 한 가족의 피난 기록
빨리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충분히 예상했지만, 전쟁이라는 비현실적인 단어가 우리네 삶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순간에 나와 아내의 걱정은 당연히 우크라이나에 남겨진 장모님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있었다. 사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여러 나라의 뉴스에서 많은 경고가 흘러나올 때, 그래도 남부에 있는 처가보다는 서부로 잠시 옮겨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 지금 바로 그냥 모셔오는 게 낫지 않겠느냐 하는 말들이 오갔지만 현실로 옮기진 못했다. 누구도, 진짜로 이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의 안일함과 부주의로 일어나지 않고, 전적으로 한 사람의 집착적인 광기에 따라 시작된 이 비극 속에 장모님은 처음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계셨던 본인의 업에 따른 총동원령에 귀속된 신분의 위치, 전선으로 바로 가시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으로 여겨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장모님과 연락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러시아의 공세는 빠르지 못했고, 우크라이나의 방어는 생각보다 튼튼하게 버티던 그 시기에 나이 든 사람들에 대해 총동원령은 약화되었다. 그리고 나와 아내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바로 말을 꺼냈다.
"모셔오자."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어떠한 설명도 필요하지 않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뒀지만 현실로 이룰 수 없던 우리의 소망이었다.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 오자, 고민은 그저 시간을 늦출 뿐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벽이 산재해 있었다. 한국은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우크라이나와 원래 무비자를 적용하던 나라는 아니었기에, 어떤 의미로든 인도주의적 난민 신청이나 한시적 무비자 입국이 열려 있던 나라가 아니었다. 거기다 전쟁이 시작되자 키이우 대사관은 우크라이나에서 잠시 철수하였기에, 우리에겐 한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평소보다 좀 더 복잡한 몇 가지 결정을 해야 했다. 어느 나라로 피신하여, 비자신청을 빨리 마치고 한국으로 올 것이냐에 대해.
이것만큼은 아내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이 전적으로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내 나라의 법이 까다로운 것은 나의 잘못은 아니지만, 한국인으로서 한국 입국에 필요한 서류 준비의 책임은 나여야 하니까. 나는 그때부터 폴란드 바르샤바 대사관에서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임시 비자업무를 봐줄 수 있는지, 서류가 우편으로 가지 않고 원본 입증이 된다면 전자서류로 괜찮을지 등을 꼼꼼히 대사관과 따지며 확인했다.
아내는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까지 장모님이 어떻게 이동해야 할 지에 대한 담당을 맡았다. 다행히 전시지만 피난열차의 표는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었고, 아내는 우크라이나 철도청에서 바르샤바까지 장장 24시간이 걸리는 기차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매일 갱신되는 사이트 시간을 집착적으로 확인하며 결국 장모님이 가실 수 있는 날짜의 열차표를 구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장모님께서는 처음에 굉장히 힘겹게 받아들이셨다.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시고,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만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장모님에게 잘 알지도 못하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가서, 또 그 바르샤바의 한국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접수하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오는 그 모든 일정이 장모님께는 커다란 부담이셨다.
다행스럽게도, 먼저 피난 가신 분들 중 장모님의 지인도 몇몇 계셨는지, 바르샤바에서 장모님이 도착하시면 대사관 이동과 호텔로 가는 법 등 편의를 봐주실 분이 계시긴 했지만, 장모님께서 걱정하시는 부분은 조금 더 큰 것 같았다. 평생 살던 집을, 전쟁이라는 이유만으로 떠나야 하는 그 상황에 대한 생각, 나로서는 가히 짐작할 수 없는 크기의 감정이었기에 나는 그저 나의 할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장모님은 작은 가방 하나에 짐을 싸셨다. 평생 살던 집을 떠나는데도, 챙긴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고 했다. 사진 몇 장과 옷가지, 그리고 나와 아내, 아이가 함께 있는 사진 한 장.
국경까지 가는 기차는 몇 번이나 연착되었고, 신호가 끊기는 구간에서는 몇 시간씩 소식이 없기도 했다. 우리는 휴대폰 메신저를 붙잡고 거의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장모님께서 마침내 폴란드에 도착했다고 했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마무리되어, 장모님께서 한국에 들어오시는 날이 되었다. 폴란드 공항에서 짤막하게 "이제 비행기를 타네."라는 메시지를 끝으로 바르사뱌에서 인천으로 날아오는 비행기를 체크한 나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공항 입국장으로 차를 몰았다.
바르샤바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비행기에 우크라이나 피난민이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입국장엔 출장자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었고, 나와 아내는 그들과 조금 다른 마음으로 입국심사를 마쳤다는 장모님의 메시지에 졸였던 가슴을 품고 그저 입국장 입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장모님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영상통화로는 몇 번이나 얼굴을 봤지만, 실제로 마주한 모습은 조금 달라 보였다. 몸이 전보다 훨씬 작아진 것 같았고, 어깨에는 오래된 코트 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아내가 먼저 달려가 안겼다.
장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딸의 등을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그 장면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며 나는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그렇게 장모님을 모시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모든 것이 조금씩 새로웠다. 장모님은 아침마다 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갔고, 시장에 가는 것을 은근히 즐거워하셨다. 김치 냄새가 강하다며 웃기도 했고, 보르쉬를 끓여 주시며 “이건 진짜 맛”이라며 농담을 하시기도 했다.
아이도 외할머니를 무척 좋아했다. 한국어와 우크라이나어가 뒤섞인 말로 장모님에게 이야기를 했고, 장모님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계속 웃으며 대답해 주셨다. 우리 집 거실에는 다시 웃음소리가 조금 더 늘어났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우리는 아주 미묘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장모님은 가끔 창밖을 오래 바라보고 계셨다. TV에서 우크라이나 뉴스가 나오면 채널을 바꾸지 않고 한참 동안 보고 계셨고, 어떤 날은 친구들과 전화한 뒤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어느 날 저녁, 내가 장모님께 한국 생활이 어떠냐고 여쭈었을 때 식탁에서 장모님이 말했다.
“나는 아직도 이 조용함 속에서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있는 중이란다.”
조용하다는 말은 아마도 단순히 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아마도 직감적으로 장모님이 오래 계시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장모님은 우리와 함께 즐거우셨지만, 점점 더 오래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가끔은 먼 곳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시선의 끝에는 아직도 돌아가지 못한 집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이후로 어떻게 지내시냐는 질문을 잘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언젠가 장모님이 다시 돌아가시려고 하면, 막을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마도 언젠가는 해야 할 대화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우리는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웃고, 아이가 외할머니에게 그림을 보여 주는 평범한 저녁들을 하나씩 쌓아 가면서. 마치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을 것처럼.
하지만 사람의 마음에는, 아무리 멀리 와도 결국 다시 향하게 되는 곳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