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서 들려온 미사일 소리와,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던 아이
첫째 아이가 어느덧 만 두 살을 향해 무럭무럭 자라 가고 있고, 불과 며칠 뒤면 정식으로 어린이집에 입학할 날이 채 얼마 남지 않았던 때의 일이다.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에서는 새벽이었고, 한국은 점심시간이 이제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오후에 있을 회의 때문에 나는 조금 일찍 나가 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는 중이었고, 핸드폰으로 믿을 수 없는 연락을 받고 숟가락을 떨어뜨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러시아의 특별 군사작전'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는 그렇게 전혀 다른 하루로 변해 우리에게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는 선명한 러시아 군대, 헬기를 타고 키이우 근교에서 하강공습을 펼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생중계되는 모습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니, 정신을 차릴 수 없다기보다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현실에 그저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곧, 주위를 둘러보니 입을 막고 내게 아무 말도 잇지 못하는 동료들을 보며 깨달았다. 현실이구나, 정말로, 전쟁이 시작된 거구나.
팀장님께서 얼른 집으로 들어가 보라 하시며 나를 돌려보냈고, 가방을 메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는 없었다. 아내에게 전화해 보았지만 무의미한 대화가 몇 초 정도 오갈 뿐이었고,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니, 더 나빠진 정황이 적나라하게 TV화면으로 펼쳐져 있었다. 완전 전시상황으로 전환된 우크라이나 국영방송의 전시방송, 아내는 장모님과 통화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이따금씩 통화 밖으로 미사일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있었지만, 그 대화 속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저 아내의 목소리 높낮이와 표정으로 상황을 짐작할 뿐이었다. 아내가 통화를 마친 뒤에도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물을 참지 못하는 나에게 아내가 나까지 이러면 안 된다고, 정신 차리라고 그때만큼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서 서로를 지탱해 주었다.
그저 첫째 아이만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장난감을 들고 우리 앞에서 웃고 있었다. 방송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참혹함을 아직은 받아들일 수 없는 초연한 순수함으로.
그날 이후로 우리 집의 공기는 조금 달라졌다.
아내는 하루에도 몇 번씩 뉴스를 확인했다. 우크라이나의 도시 이름들이 뉴스에 등장했고, 그중 몇몇은 아내에게 너무나 익숙한 곳들이었다. 친구가 살고 있는 도시, 친척이 있는 도시, 어릴 적 여행을 갔던 도시. 뉴스 속 지명 하나하나가 아내에게는 누군가의 얼굴과 연결되어 있었다. 전쟁이란 얼마나 참혹한 일인지, 아내가 갖고 있던 소중한 추억이 그대로 부서지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하는 현실 속에 우리는 며칠 동안 말없이 서로를 안아주며 버텨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나 시위에 가고 싶어.”
한국에서도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작은 집회들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시기여서 집회가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은 편이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일들 중 하나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모님께 아이를 부탁하고 나와 아내는 주말 오후,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하기 위한 시위장소로 갔다.
그곳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크라이나 국기를 든 사람들, 작은 손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들, 조용히 서서 연설을 듣는 사람들. 아내는 잠시 그곳을 둘러보더니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아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위로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군가는 노란색과 파란색이 섞인 리본을 나누어 주었고, 누군가는 따뜻한 커피를 들고 와 사람들에게 건네고 있었다.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대신 국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준비해 간 피켓을 높이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러시아와, 러시아가 일으킨 모든 전쟁행위에 대해 규탄했다. 때로는 우크라이나 국가를 모두가 한 목소리로 힘차게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분에 못 이긴 사람들의 푸틴에 대한 욕설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비속어는 자제하고, 성숙한 시민의 자세로 시위에 임하자며 행진을 이어갔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들른 햄버거집에서 아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도 여전히 슬픈데…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은 혼자 슬퍼할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 슬퍼할 때 조금 덜 무너지니까. 괜찮냐고 물어보는 백 마디의 질문보다, 때로는 그저 손을 맞잡고 같이 있어 주고, 어딘가로 함께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의지 받는 기분이 드니까.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렇게 등을 맞댄 기분에 조금은 편안해진 아내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나 또한, 작은 안도를 비로소 내쉴 수 있었다.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뉴스는 계속 이어졌고, 아내의 가족들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어떤 날은 전화가 잘 연결되지 않았고, 어떤 날은 새벽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전쟁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우리의 일상도 어느 순간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 시간은 여전히 아침이었고, 나는 여전히 일을 해야 했고, 저녁이 되면 우리는 함께 식탁에 앉았다. 어떤 날은 김치찌개가 올라왔고, 어떤 날은 보르쉬가 식탁 위에 놓였다. 처음에는 이런 평범한 저녁 식사가 어딘가 죄책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멀리서 누군가를 걱정하는 마음과, 눈앞의 가족을 돌보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우리는 더 조용히 서로를 챙기게 되었다.
아내는 가끔 우크라이나 노래를 들었고, 나는 그 옆에서 아이와 놀아 주었다. 아이는 여전히 한국어와 우크라이나어가 섞인 말을 하며 웃었다. 세상은 여전히 복잡했고 뉴스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우리 집 거실에서는 작은 웃음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내가 말했다.
“우리 아이는 아마 전쟁을 기억하지 못하겠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야.”
그러자 아내는 아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게 좋겠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저 더 강하게 아내를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전쟁이 없는 세상을 바라는 마음은 사실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아이가 자라서 이 시간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 정도의 평범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소파 위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아기상어를 보며 춤추는 아이의 모습. 그 모습이 우리의 슬픔과 한으로 뒤덮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상은 여전히 불안하고, 먼 곳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천천히, 서로의 손을 잡고.
어쩌면 희망이라는 것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내일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저녁에는 함께 밥을 먹고, 밤이 되면 서로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그렇게 우리의 하루가 다시 흘러가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세상 속에서도. 그리고, 소중한 가족을 구해 와 함께 안전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