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나라를 허락하며 살고 있다

코로나 시대, 우크라이나로 향한 아내와 남겨진 남편의 고백

by Karel Jo


난생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등기를 칠 수 있게 된 청약이라는 기회를 맞아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대비하고 있던 그 순간들은,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나 싶지만 첫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모두는 단 한 가지의 전 세계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그 이름만 들어도 숨 막히는 그 병은, 사실 그동안 담담하게 써 왔던 그 모든 상황들의 한 가지 제약을 빼놓고 떠올린 기억들이다. 그건 바로,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집착적인 통제 속에 살아가던 시기라는 것.


어쨌든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의 문화와 교육, 가치관 속에서 자라온 나는 우리나라 특유의 정부 주도적인 통제에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도 가끔은 어디에나 마스크를 쓰며 조금만 기침을 해도 눈치를 주는 그런 문화들이 과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동아시아 특성상 튀어나온 못은 어떻게든 박아 넣는 것이 더 익숙한 사회와 환경 아닌가. 나는 튀어나온 못이 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만은 있어도, 언제나 성실하게 규칙을 지켜 왔고, 그것이 사회인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는 대한민국의 이 강박적인 질서 정연함에 상당히 숨 막혀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초기의 강력한 통제로 다른 나라들에 비해 효율적으로 환자들이 관리되고 했을 때는 아내 또한 우리나라의 안정적인 시스템 관리에 대해 감탄을 보냈지만, 지속된 강력한 거리 두기와 마스크를 어느 순간부터는 견디기 어려워했다. 그게 아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바람 한 번 쐬러 가기 힘들다는 점에도 한몫하게 되니, 아내가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이제는 더 못 참겠어. 나 친정에 다녀올 거야. “


그 울림을 내가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부모님께서는 이해하지만 탐탁지는 않게 보셨어도, 첫째를 낳고 근 1년 반 동안 경기도는커녕 시외 외곽 외출도 자유롭지 않았던 아내의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장모님께 아이를 보여드리고 싶다는 그 의지와 뒤늦게 찾아온 우울감을 달랠 방법도 당시의 나로서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내의 여행이 힘들지 않게 좋은 비행기 좌석을 끊어 주고, 매일 새벽 아직도 예민한 첫째 아이를 위해 아내와 교대로 잠을 자며 아이를 키워낼 뿐이었다.


그때의 나는 공교롭게도 나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옮겼던 한 회사를 반년만에 그만두고, 현재의 직장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입사한 지 채 얼마 지나지도 않은 9월 초순, 그렇게 나는 아이와 아내를 인천공항으로 잠시 떠나보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직 이스탄불을 거쳐 아내의 본가인 자포리자 공항을 갈 수 있는 때였다. 비록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이 되었지만.


제주도 비행기는 타 보았어도 우크라이나까지 장장 16시간의 비행, 그것도 직항이 아닌 이스탄불에서 한 번 환승해야 하는 비행기 일정에 나는 꽤 걱정했다. 비즈니스석을 끊긴 했지만, 아이가 이스탄불에 갈 때까지 잘 버텨 줄까? 18개월 남짓 된 아이를 같이 동행하며 힘든 비행을 할 아내의 체력도 걱정되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믿음 아래 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하루가 지나고 퇴근길에 걸려 온 아내의 페이스톡에서 반가운 장모님의 얼굴과 아직 여기가 어딘지 어리둥절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 그리고 고향의 땅이 주는 힘 속에서 편안한 얼굴을 한 아내의 웃음을 볼 수 있었다. 아내는 아이가 비행기 안에서 전혀 울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살갑게 웃으며 최고로 잘해주었다고 아이를 쓰다듬었고, 아이는 카메라 너머로 보이는 나의 낯선 모습에 “아빠?”를 웅얼대며 화면을 톡톡 두드리다가, 어디론가 쪼르르 달려갔다가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인터넷 사정이 그리 좋은 건 아니었기에 조금은 끊기는 통화의 마지막에 아내는 나지막이 내게 ‘고마워’라고 말하며 눈물지었다. 그때에 새삼 내가, 국제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확 와닿았다. 보통의 한국여자와 결혼했다면, 아무리 친정이 멀다고 해도 제주도 정도일 테고, 어머니를 보러 간다는 행위 자체가 그렇게 힘들고, 계획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겠지. 계획적인 나에 비해 즉흥적인 아내로서는, 힘들 때마다 엄마를 보고 싶다는 충동을 꺾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남편으로서 내가 최선을 다해 잘해준다고 한들, 남편으로서의 내가 아내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건 아니기에. 우리 모두는 서로의 동반자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서로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아니기에. 나는 뒤늦게나마 표현을 많이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동안 속으로 많이 삭혀왔을 아내의 마음에 시린 가슴으로 말해 주었다. 언제라도, 돈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원하는 때에 언제나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으니 나에게 말해 달라고.


물론, 두 달을 편안히 지내고 오라고 보낸 처음과 달리 결과적으로 아내는 한국에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았고, 우리나라의 서비스 편의성에 압도적으로 익숙해져 있었다.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에, 아내는 처음 말한 기간보다 2주 정도 앞선 일정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왔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의 아내 얼굴에 서린 편안함을 잊을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우크라이나에 정착했어도, 아내는 지금의 나처럼 나의 향수를 이해하려 애썼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나라를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지만, 대신 이해하려고는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 두 문화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의 아이를 세상으로 내보낼 시간이 다가왔다.


keyword
이전 15화운명으로 다가온 지금의 우리 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