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래서일까, 가라앉게 된 이유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집에는 많은 책이 있었고,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쁘셔서 항상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셨고, 나는 그렇게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남는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책을 읽는 것 뿐이었고,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꽤 좋아했다.
그림책과 동화책, 전집으로 시작된 책의 탐독 끝에 점점 나는 소위 글밥이 많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안산에서 혼자 삼성역에 있는 코엑스에서 열리던 국제도서전을 신문에서 보고 찾아가기도 했다. 책은 점점 인문과 역사, 종교로 확장되어갔다.
다양한 책에서 오는 지식은 언제나 나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생각이 많은 나로서는 그 지식이 머릿속으로 들어온 이후로도 나 자신의 기억으로 가공하여 저장하는 것을 즐겼는데, 고등학교 때부터는 그걸 말할 기회가 생겼다. 토론, 이라는 것이 한창 고등교육에서 중요성이 부각되는 시기였다.
누군가와 나의 생각을 나눈다는 것. 서로 맞는 소리를 각자의 입장에서 한다는 것. 때로 틀린 이야기를 우기는 사람도 종종 있기는 했다. 하지만 보통 그렇게 되면 틀린 이야기를 하는 쪽이 인정했다. 잘못된 지식으로 얘기한 것을 사과하는 일도 많았다. 정반합의 과정, 누가 맞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합의였으니까.
그러나 요즘은 합은 없어졌다. 정과 반이 그저 치열하게 싸워 누군가 하나가 승자라고 손을 들어줘야만 끝나는 싸움이 각계각층에서 지리멸렬하게 일어나고 있다. 누가 맞고 틀리고가 이제는 가장 중요하기에, 행간 한 마디 마디마다 틀린 말을 했는지, 사실과 다른 말로 교묘하게 속이고 있지 않는 게 더 중요한 때가 됐다.
아마도 내가 최근에 질식할 것 같은 숨막힘으로 내려앉은 것도 그런 소모적인 논쟁이 더없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로 뜻이 맞지 않더라도, 지지하지 않아도 같은 목표를 가졌다면 협조하고 협업할 수 있다. 그것이 일이니까ㅡ라는 생각을 가진 나에게 요즘 세상은 참혹하게 나를 옥죄어 온다. 우리 모두 같은 선상에 있나요? 내가 말하는 것에 이해가 서로 다른가요? 맞나요? 끊임없이 요구받는 동의와 재청에 옥죄어진 목의 숨구멍이 달아날 곳은 없다. 질식 끝에 끄덕여진 고개가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바라봐야 할 뿐.
혹자는 힘겨워하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덮어내고 흘려 보내라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니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라고. 맞는 말이다. 언제나 지혜로운 말인 let it be,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쉴 마음의 쉼터니까. 지나가면 이 모든 것들이 가벼운 웃음으로 남는다. 기억도 나지 않을 현재의 1시간은 미래의 아득함에 묻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고통을 무던히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닐텐데. 나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어느새 마치 모든 세상이 극단주의자들로 남아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과거엔 정보를 얻을 방법이 너무 부족했다면, 지금은 확증편향된 과도한 정보만이 서로의 편을 낙인찍기에 바쁘니까. 나는 누구의 편일까?
어쩌면 나의 힘듦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해 망설이는 나의 발걸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의 편도 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 상황에 맞는 최적의 상황으로 삶을 끌고 가고 싶으니까.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풀어가고 싶으니까.
그러나 이념을 벗어난 시대에서 다시 새로운 이념으로 애써 들어가려는 사회에서 나는 그렇게 또 이방인이 되며 누구의 편이냐는 검증에 고개를 떨구며 침묵한다. 곧, 한번 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의 혼란 속에 쓰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