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Eurofilm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renine Nov 22. 2020

알리 아바시, 경계선 (2018)

영화 <경계선>으로 바라보는 현대사회의 정치 현상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올해 미국 대선을 어느 때보다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중 압권은 조지아와 펜실베이니아 주의 개표 도중 트럼프의 갑작스러운 연설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This is a fraud on the American public. This is an embarrassment to this country. We were getting ready to win this election. Frankly, we did win this election.


트럼프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남은 우편 투표는 전부 사기이며 (대법원에 가서 남은 개표를 중단시킬 것이므로) 우리는 거의 이기고 있다. 솔직히는 이미 이겼다 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가 현재의 선거 제도와 민주 절차, 헌법 질서, 기타 모든 사회적 약속에 대한 트롤링을 하고 있단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루스 베이저 긴즈버그는 이미 수년 전에 faker의 등장을 예고했다. 트럼프의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이번에 안 되면 2024년에도 출마를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링크). 미국의 대통령이 권력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고, 절차적 정의를 따르려는 의지는 없어 보였다.


트롤링이란 말을 근 몇 년간 심심찮게 들어왔다. 트롤은 북유럽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흉측한 괴물인데, 주로 인간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심술궂은 악당에 가깝다. 최근에는 온라인이나 게임 상에서 '어그로'를 끌어서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고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자들을 일컫는 밈이 되었다. 친구들이랑 하는 보드게임에서조차도 게임의 룰을 잘못 익히고 역할에 안 맞는 돌발 행동을 하면 자칫 트롤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트롤링은 철저히 익명으로 행해진다.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공개 줌 회의를 많이 하는 추세인데, 모든 참가자에게 공유되는 화면에 포르노 영상을 올리는 익명의 트롤(이른바 '줌 바머 Zoom bomber')들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링크). 더 광범위하고 공격적인 트롤 군대도 있다. 바로 러시아의 조직화된 댓글 부대인데, 이들의 목적은 특정 정치적 의견을 지지하게끔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를 대량의 정보들로 도배하여 무엇이 진짜고 가짜 뉴스인지 판단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본 목적이다.(링크)


참여자들로 하여금 정치 뉴스에 염증을 느끼고 무관심하게 만들어 도둑정치(kleptocracy)의 정권 장악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 그들의 본 의도이며, 이러한 시도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다.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나타나는 트롤들을 군중 속에서 구분 짓는 명백한 경계선은 없다. 권력에 대한 욕망, 왜곡되고 음성화 된 성적인 욕망들이 '정상 범주'의 사람들에게 갑작스럽게 노출되어 불쾌감을 자아내고, 그 장막의 뒤편에서 가학적인 웃음을 짓는 불특정 세력, 트롤들이 있다.


'경계선'의 경계선은 없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영화 <경계선>은, 이란계 이민자 출신 스웨덴 감독인 알리 아바시의 개인적인 성장 환경으로 인해 주로 난민, 성 소수자, 장애인 등 소외 계층에 대한 전복적인 시선으로 극찬을 받았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경계선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그들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끼고 끝내 경계선을 긋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는가? 사회적 기준과 무관하다면 무엇이 인간성의 필요조건인가? 이런 주제 의식들을 파격적이고 탁월하게 풀어낸 영화임에 깊이 공감한다. <경계선>은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시선> 수상을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으로 규정된 소수자들에 하나도 해당사항이 없다면, 소위 '일반인'인 우리는 티나가 될 수 없는가? 아니면 보레가 될 수 없는 것인가?


경계선이라고 검색을 하면 가장 먼저 따라 나오는 검색 결과가 '경계선(성) 성격장애', '경계선(성) 지능장애' 등의 병명이다. 나는 처음에 경계선이 borderline의 그 경계선인지 몰랐다. 뜻을 알고 나서는 아주 애매하고 어찌 보면 무책임한 병명이라고 생각했다(너는 정신증과 신경증 그 어딘가의 경계에 있는데 나도 모르겠어. 근데 이건 아주 심각한 질환이야). 경계선 성격 장애는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9개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5개 이상 항목에 해당되면 경계선 성격장애를 의심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자신이든 타인이든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며, 정확한 진단은 반드시 정신과에 가서 받아야 한다. (링크)  


버려지는 것(실제 또는 상상)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함.

타인을 이상화하고 평가절하하는 것을 반복하여 관계가 불안정하고 격함.

자아상 또는 자아 인식을 자주 바꿈.

최소 두 가지의 해를 끼칠 수 있는 행동을 충동적으로 행함(위험한 성관계, 폭식, 난폭 운전 등)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살을 하겠다고 위협하며 자해하는 등 자살 관련 행동을 반복적으로 행함.

기분 변화가 빠름(대개 몇 시간 동안만 지속되며, 며칠 이상 지속되는 경우는 드묾).

만성적으로 공허함을 느낌.

부적절하고 격렬하게 화를 내거나 분노를 조절하는 데 문제가 있음.

스트레스에 의해 유발되는 일시적 편집성 사고 또는 중증 해리 증상(비현실적으로 느껴지거나 스스로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느낌)


그런데 이를 찬찬히 읽다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상당수의 항목들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도 흔히 겪고 있는 감정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구인들 저 모든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랑하는 연인과 소중한 친구에게 버림받는 것을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극도로 두려워하지 않을 뿐이지, 누군들 버림받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는가.


누군가는 가까운 사람에게 굉장한 기대를 갖고 높이 평가하다가, 그 사람이 성에 차지 않거나 부족한 모습을 보였을 때 무척 실망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각자의 자아상은 수시로 바뀌기도 한다. 가끔은 스트레스를 충동적인 섹스와 폭식으로 풀기도 하며, 너무 힘들 때는 차라리 다 관두고 죽고 싶다는 기분을 느껴보기도 한다. 많은 현대인들이 일상으로부터 권태와 공허함을 느낀다. 때로는 분노 조절에 실패한다거나 어딘가에 병적으로 집착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렇다면 어떤 '경계선 장애에 대한 경계선'에서 몇 걸음 더 멀찍이 떨어져 있을 뿐, '경계선에 대한 경계'는 사실은 없다.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상태가 악화되어 사회적 룰, 금기를 깨기 시작하고, 일상생활에 지장에 주는 지경에 이르러 병원에서 진단을 받게 될 때까지 말이다. 고로 우리는 방심하다간 누구나 티나가 될 수 있고, 보레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티나의 트롤링(trawling)

티나는 본인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자랐고, 자아상을 아직 찾지 못한 채로 내면의 욕망들을 억누른 채 살아간다. 그녀는 롤랑드가 자신을 이용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또 그가 동물들을 대하는 방식이 자신과는 정반대임에도 모든 걸 묵인한다(투견꾼이며, 경마게임을 보면서 중독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롤랑드와 그를 놔두고 밖으로 가서 순록을 어루만지는 티나). 그가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기에, 즉 그녀가 그토록 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롤랑드라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도 자신을 버리고 떠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고 보면 그도 좋은 사람'이라고 아버지에게, 또 스스로를 세뇌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트롤이지만, 살아있는 야생 본능과 후각으로 국경에서 밀입하는 범죄자들을 잡아낸다. 즉 그녀는 그물망으로 불순자들을 걸러내는 고기잡이 '트롤링 trawling'을 한다. 어쩌면 티나는 우리 내면에 생생히 살아있는 양심의 소리를 체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덜 문명화되고 조금은 거칠고 투박한, 그러나 한없이 아름다운 마음. 멀쩡한 외모로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가는 비즈니스맨은 사실 조주빈같은 아동 포르노의 운반자였다. 양심과 죄책감에 무뎌진 현대인들을 대신하여 티나는 그 불편한 감각들을 대리로 느낀다. 대신해서 부끄러워하고 분노하고 죄책감의 냄새를 맡는다.

나아가 그녀는 범죄 수사에 협조하게 되는데, 범죄 조직 내부에 침입하여 그 뿌리를 적발해 내는 데 기여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을 은근히 배척하고 멸시하는 인간 사회임에도,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자연과 섬세하게 교감하는 그녀는 끝내 인간들와의 괴리를 좁히지 못한다.


그러다 티나는 동족인 보레를 만나게 되고, 친숙하고도 낯선 감정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 보레는 내적 욕망에 충실한 트롤이기 때문에 티나에게 본인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법, 스스로를 인정하는 법을 알려준다("당신은 결점이 없어요."). 티나와 보레와의 만남은 따로 보았을 때 기형적인 두 존재가 만나서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일 때 이루는 합일이 얼마나 충만하고 아름다운지를 보여준다. 그들의 사랑은 거칠고 야생의 소리에 가까우며 그들의 일탈을 관음하는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둘의 모습은 문명에서 벗어난 인간의 순수한 본연의 모습이다.

보레의 트롤링(trolling)과 아기 바꾸기

티나가 자연과의 순수한 교감에 온 감각을 집중할 때, 보레는 본인 내면의 어두운 욕망도 직시하는 존재이다. 서로의 탯줄처럼 연결된 그들은, 그 줄의 끝을 따라갔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명과 암 같은 존재였음을 '히시트' 씬에서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추악한 모습을 본 티나의 혼란과 슬픔, 좌절과 분노가 흘러내리는 눈물과 포효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불안정한 눈빛, 복수심, 무고한 이에게 해를 끼치고 싶은 충동, 은밀하고 가학적인 쾌락, 스스로 죽음으로 떨어지는 모습(바다로 몸을 던지는 모습), 분노와 폭력, 이런 내면의 어두운 속성들이 보레라는 인물에게 응집되어 있다.


따라서 보레 혼자서 낳는 '히시트'는 불완전하다. 히시트는 보레가 정기적으로 홀로 낳는 일종의 난자이다.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히시트는 먹고 자기만 할 뿐, 그 안에는 인간됨을 이루는 영혼이 부재한 상태이다. 보레는 자신이 낳은 히시트를 인간의 아기와 똑같게 키워서 맞바꿔버린다. 그러나 인간들은 아기가 맞바뀌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의사를 부른다. 그저 아기가 온전히 살아있지 못하고 이유도 없이 죽어가고 있음을 진단할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익명과 문명의 이기를 빌려 표출되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욕망들은, 때로 우리가 지켜온 어떤 사회적 약속, 정당하고 민주적인 절차, 제도적 유산을 무화하려 한다. 그들은 대놓고 파괴하려 하지 않지만, 그 작업은 몰래 담을 넘어 아기를 바꿔 놓듯이 은밀하고 교묘하게 수행된다. 결과적으로 보이는 현상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근본을 짚고 넘어가지 않은 채, 그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아기가 아프고 죽어가고 있다고만 진단 내리는 것이 오늘날의 형국이다.


2016년의 샤이 트럼프 지지자들은 여론조사기관을 보기 좋게 따돌렸다. 그리고 4년 뒤, 이들은 또 여론조사를 적극적으로 거부해서 텍사스 같은 일부 주에서는 여론조사의 예측과 상반되는 결과를 낳았다. 남부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고 하는데, 정확히 왜 그런지는 학술적인 연구 결과가 나와있지 않다. '이번에도 너희의 예측을 빗나가서, 골탕을 먹여주지'라는 심사 때문일까. 결과적으로 지난 미국 대선에서는 그동안 미국이 100년 이상 유지해온 자랑스러운 전통, 즉 민주주의와 다양성의 포용을 비롯한 여러 가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언사를 쏟아내는 인물, 이를 전혀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한 인물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번 대선에서 바로 그 인물이 역사적으로 영영 회자될 트롤링을 시전 했다.


꼬리를 자르지 않은 아기

서로 상반되어있지만 닮기도 한 티나와 보레 사이에서 생명을 가진 아기가 탄생한다. 마치 모세의 아기바구니처럼 티나의 삶의 가두리에 와 닿는다. 아기는 마치 땅에서 캔 것 같은 감자 같은(...) 비주얼로 태생적으로 강한 생명력을 지닌 듯하다. 그러니 먼 핀란드에서도 혼자서 긴 여행을 견디지 않았을까? 아기 안는 것이 서툰 티나에게서 관객들은 모성애와 부성애, 그 경계선 어딘가에 있는 따뜻한 감정을 느낀다.


이 아기를 어떻게 키워낼 것인지가 티나에게 숙제로 주어진다. 보레처럼 트롤들의 천국인 핀란드로 가서 인간 사회를 배척하면서 동족들끼리 낙원을 이루고 살 것인지, 아니면 인간들 주변을 맴돌며 돌아오는 것 없는 희생을 치르며 살 것인지 티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녀는 처음으로 작은 벌레를 잡아서 아기의 입에 넣어준다. 아기는 마치 엄마 젖을 빨아먹듯 벌레를 맛있게 먹는다.


엔딩 부분은 아기가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티나 스스로의 강한 의지로, 온당히 마련해준 보금자리에서 자라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기는 인간과 자연, 문명과 야생, 이성과 본능의 경계선에서 자랄 것이고,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고독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아기가 엄마보다는 본능에 충실하여 행복하게, 그러나 현실적인 인간의 기준으로는 훨씬 더 척박하게 살아갈 것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티나는 인간들과 달리 아기의 꼬리를 자르지 않을 것이다.


마치며

우리의 내적인 본능과 자유에 충실하면서도 양심, 이성의 소리를 잃지 않으며 살아가는 경계선의 삶은 얼마나 빈곤하고 척박할 것인가. 점점 양극화되는 빈부격차 속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주변화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고단한 현실을 오늘도 살아내고 있다. 요즘은 많은 20대~30대의 젊은이들도 귀농을 주도한다는 뉴스를 들었다(링크). 적법한 절차를 통해 열심히 일하고 살면 수십 년 뒤에 삶이 나아질 것이란 희망은 유효기한이 지났다. 이들은 자칫 이성과 양심의 끈을 놓았을 때, 보레처럼 사회를 습격하는 트롤이 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이들의 현실을 보듬을 수 있는 현실인식,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윤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익명의 힘을 빌어 극단적으로 욕망을 표출하는 개인들을 검거하고 정의 구현을 하면서도, 현상을 낳게 된 원인 동시에 진단을 하는 일은 시간이 필요하고 정말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단순히 방치하거나, 구식의 윤리-사회적 잣대만 들이댔을 때, 누군가는 아기 바꿔치기라는 범죄를 시도하고 무고한 누군가는 희생당할 것이다. 사회적 자정 작용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을 때,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게 된다.  


이렇게 영화 <경계선>을 보며 좀 더 일반적이고 정치적인 논의를 끌어와 보았고, 내용에 공감을 받고자 온갖 현대적 트롤링에 대한 인용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나 긴 이야기를 했는데도, 아직 부족하다고 느낀다. 특히 소수자와 소외계층에 대한 논의를 많이 생략하면서 글을 썼다. 그러나 나에게 <경계선>이라는 영화는 단순히 정상인들이 소수자를 포용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성의 문제로 읽힌다. 경계선의 경계선은 없다는 것, 나는 차라리 그것이 감독이 원하는 해석의 방향성이었으리라고 감히 짐작해본다.


                                                                                                     [Eurofilm 5. 스웨덴, 덴마크]


<이미지 출처>

https://www.newyorker.com/culture/culture-desk/i-accidentally-walked-into-border-and-it-kind-of-changed-my-life 
https://www.npr.org/2018/10/25/658869095/swedish-film-cleverly-blurs-the-border-between-reality-and-folklore 
https://makeupmag.com/troll-models/

2020년 11월 20일 감상 / 2020년 11월 22일 씀.

매거진의 이전글 피에트로 마르첼로, 마틴 에덴 (201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