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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ine Dec 13. 2020

'법카'에 대한 도덕심리학적 실험

조너선 하이트 <바른 마음>

* 지인과 공동으로 책읽기 모임을 하면서 쓴 글입니다.


새로 들어간 회사는 전 직원에게 법인 카드를 준다. 그동안 법인 카드는 특별한 연유가 있을 때 상사에게 받아서 쓰곤 했었다. 다른 모 회사에서는 직원에게 전원 법원 카드를 맡긴다더라, 전설 속의 동물처럼 말로만 듣던 '법카'를 출근한 첫날에 지급받았다. 다음으로 사용 규칙을 들었다. 법인카드를 쓰는 것은 회사에 도움이 될만한 일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식대는 물론이고 아침에 더 맑은 정신으로 일하기 위한 커피 사먹는 것, 업무에 도움되는 책 사는 것, 팀과 같이 할 보드 게임을 사는 것, 하다못해 술 먹는 것이 정말로 필요하면 거기에 써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수증 처리를 안 한다고 했다. 할 시간에 회사의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라는 취지인데, 내겐 꽤나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법카를 받은 이후 나는 조너선 하이트 저 <바른 마음> 1장에 나오는 도덕심리학자의 실험 대상자가 된 것 같았다. 일단 지갑에 법카가 들어 있으므로 전보다 항상 주의하면서 가지고 다녔다. 둘째날에 문구점에 가서 필요한 펜을 사고, 가격대가 있는 노트북 거치대를 살 때는 조금 멈칫했다. 나는 정당하게 회사 생활에 필요한 것을 샀는데 영수증 첨부를 안 하니 무결함을 증명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했다. 그냥 내 돈으로 살까? 아니다. 이것은 엄연히 회사 업무에 필요한 것이다. 혹시나 나중에 질문이 들어올 수 있으니 영수증을 보관해놓자.


그렇게 조금씩 회사에 적응해 갔다. 팀원들이 밥을 먹으러 갔을 때 내 개인 법카로 계산을 하기도 했다. 점점 영수증이 쌓여 가면서 그 종이들을 관리할 의미는 점점 없어져갔다. 영수증 처리할 시간을 줄여준다는 제도의 의의가 퇴색되었으며, 나중에 불시에 감사를 받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신세계였고,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은연중에 애인에게 '우리 회사는 법카도 주고 영수증 처리도 안 한다'며 자랑하기도 했고, 순간 그 자랑에 취해서 "회사 앞에 오면 밥 사줄게~"라고도 말해버렸다. (맹세코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쓰고 있는지도 궁금했으나, 회사에서는 오롯이 개인적인 양심의 판단에 맡기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예전에 일하던 어떤 사람이 주말에 친구와 밥을 먹는 데 남용해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주말에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친구가 회사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도 아닌데 법카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내가 '밥 사줄게'라고 호기를 부렸던 것이 생각나면서 양심의 가책(소위 찔림)이 느껴졌다. 만약 내가 야근을 하고 집에 가는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맥주 한잔을 할 때 법카를 쓰는 것은 괜찮은가? 회사 앞에서 먹는 것과, 집에서 치킨 먹는 것에 차이가 있는가? (코로나 때문에 밖에서 먹을 수 없었다면, 집에서 치킨 먹는 것도 괜찮은가?) 만약 동료랑 함께 술을 먹는다면? 그냥 업무와 상관없는 친구와 술 한잔을 하는 데 쓴다면? 나 스스로 판단하기에는 아리송한 부분들이 많았고, 회사의 사수가 이러이러한 것은 명확하게 잘못되었다고 못 박아 주는 순간에 깨달음이 왔다. 나는 왜 스스로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가 스스로 실망스러웠고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안되는 사례는 정확하게 이야기해줘야 하는 거 아냐? 소위 사회적 규약이라는 걸 제시해줘야 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온전히 개인의 양심에 맡기고 나중에 추궁을 하는 것은 누구나도 싫어할 법한 일이었다. 사회 규약을 한두번 정도 어긴 사람이 아니라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비난받기 싫기 때문이다.


이전 회사를 다니면서 영수증 처리를 했을 때는 가끔가다 친구와 저녁을 먹고 그 영수증을 식대로 청구한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야근이나 주휴수당이 없는데도 야근을 밥먹듯이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나의 행동은 정당화된다고 생각했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지의 여부로 도덕 판단을 하는 합리주의 이론의 관점으로 생각할 때 내가 회사에서 창출하는 가치가 친구에게 밥사주는 비용 이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 한들 나의 행동이 합리화되지는 않는다. 이것을 법카 실험에 참여(?)하면서 재고해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회사에서는 명확하게 규칙이 제시되었고, '회사에 도움되는 방향이면 무엇이든'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도덕적인 판단은 온전히 내게 맡겨졌고 말이다. 이로써 저자의 1장 결론 부분 중 마지막, 도덕성에서 합리주의 이론이 갖는 한계와 문화를 통한 학습, 문화적인 유도의 역할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과거 조직의 문화와 규율 안에서 나름의 도덕적 판단을 내렸었다. 먼저는 밥먹듯이 야근하는 문화에 대한 반감 어린 감정이 우선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든 내 행동이 규약을 어기기는 하였으나 그렇~게까지 비도덕적인 행동이 아님을 정당화하기 위해 위와 같은 논리를 만들어낸 것은 분명했다.


다음으로, 무엇이든 개인의 자율적 판단과 양심에 맡기는 이 회사의 정책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힘들거나 못견딜 정도의 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마치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살아온 수동적인 사람들이라고 속단했다. 정작 실제로 엄청난 자율성을 갖게 되어보니,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었다. 나의 양심의 범위가 무엇인지 끊임 없는 토의를 해야 했다. 어찌 보면 명확한 룰이 있을 때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편한 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법카를 받아 들었을 때의 기쁨은 잠시였고, 내가 정말 자유롭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은 이전 회사와 마찬가지로 제한적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개인의 양심의 판단에 따르고, 불필요한 행정처리를 줄여준다는 점이었다. 부작용의 사례는 있더라도 이 제도는 계속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나에게 남용된 사례를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면 내가 어느날 법인 카드로 친구와 맥주 한잔을 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사회적 규약을 일이 다 끝난 후에 사후적으로 지적해주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좀더 실험이 필요할 것 같다.


회사가 아주 작은 조직이긴 하지만, 엄연한 문화가 있기에 여기에 적응해 가고 있다. 사람은 선천적인 도덕관을 가지는 동시에 특정 문화 속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저자의 마무리 말이 공감가는 지점이다. 만일 내가 위처럼 규약을 어기는 행동을 했다면, 도덕적 판단을 질의했을 때(마치 하이트의 연구에서처럼) 국적, 지역, 연령, 계층 별로 어떤 답변이 나왔을지 궁금하다.


2020년 12월 13일 씀.

덧... 직감(역겨움과 경멸감 등)이 도덕적 추론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실제로 느낀 적 있다. 고등학교 때 필리핀에 연수를 갔는데 스테이 했던 집 식구들이 발룻을 권한 적 있다. 나는 정말 매일 닭고기 요리를 해 먹는 닭 학살자이다. 그런데도 부화한 병아리(?)를 먹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역겨웠고, 설명할 수 없이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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