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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ine Apr 04. 2021

느림 La lenteur (1995)

내일은 없다. 청중도 없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우연한 독서

미뤄두었던 쿤데라 전집 읽기 시리즈를 갑작스레 8권 <느림>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별다른 것은 아니고 대학 옆에 있는 한 중고 서점에서 이 책을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다. 책에는 밑줄들과 함께 한국어 명사들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바른 글씨체로 적혀있다. 공명심(옆에 공을 세워 자기의 이름을 널리 드러내려는 마음), 경악(소스라치게 깜짝 놀람), 겸양(겸손한 태도로 남에게 양보하거나 사양함), 실색(놀라서 얼굴빛이 달라짐) 같은 단어의 뜻을 얻어 읽으면서 왠지 책의 전 주인은 문학을 공부하러 유학 온 외국인 학생은 아니었을지 상상이 되었다. 덕분에 즐거운 경험을 하며 읽었다.

소설은 곤충학회가 열리는 프랑스의 옛 고성(古城)을 배경으로 한다. 지난 세기에 많은 프랑스의 성들은 호텔로 바뀌었다. 이렇게 현대적으로 전락한 성 안에서 3개의 서로 다른 시간이 중첩되어 소설 속 이야기가 흘러간다. 먼저 아내 베라와 함께 이 성에서 묵고 있는 작가(후반부 '밀란쿠'로 언급되며 밀란 쿤데라 본인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80년대 말의 표상화된 인물들이 있다.(지식인 베르크, 청년 뱅상, 방송인 임마쿨라타) 이들은 성에서 열린 곤충학회에 참석하며 하룻밤을 보낸다. 마지막으로는 같은 성을 배경으로 T부인과 기사의 하룻밤을 그린 비방 드농의 다른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18세기의 예술과 정신을 담고 있는 이 이야기가 대위와 화성을 이루면서 앞선 캐릭터들과 어우러진다.


속도의 엑스터시

실존 수학에서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느림>을 관통하는 것은 실존 수학의 이론이다. 소설의 도입부는 인물들이 앞으로 얽히고설키는 원리를 알기 위한 간단한 공식을 제시해 준다. 먼저, 시간의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의 SF적 상상력 속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달콤한 관능을 맛보는 순간에는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가기를 바라며(즉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며), 반대로 그 관능의 순간이 실없이 깨지거나 본인이 우스갯거리가 되는 모욕 앞에서는 시간이 한시라도 빨리 흐르기를 기도하기도 한다(이 때는 시간이 초단위로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낀다). 1장의 오토바이의 사례는 이러한 실존 수학의 공식을 소개하기 위한 단초이다. 기술 혁명은 인간에게 속도의 엑스터시를 선사했다. 기계에 속도를 위임한 인간은 잠시 자신의 육체로부터 이탈하여 단절된 그 순간 안에만 존재한다. 이때 과거도 미래도 사라진다. 수치심은 과거로부터 오고 두려움은 미래로부터 오기 때문에,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 마저도 저 멀리 사라진다. 비로소 인간은 본인마저도 잊고서 속도 자체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몰아의 경지, 그 망각으로부터 해방이 찾아온다. 반면에 달리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쇠락한 육체 안에 갇혀있는 자아를 발견한다. 그는 스스로와 인생의 시간을 그대로 느끼며 달린다.


춤꾼과 대중

실존이 갖는 각각의 새로운 가능성은, 비록 그것이 극히 있음 직하지 않은 일일지라도 실존 전체를 탈바꿈시키는 까닭이다. 어떤 가능성이 우리의 실존을 탈바꿈한다.

이제 인물들이 등장한다. 베르크라는 인물은 지식인이자 춤꾼의 전형으로 묘사된다. 파우스트가 악마의 계약을 맺었다면 이들은 천사와의 계약을 맺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들은 권력도 자유도 아닌, 명예를 갈구하는 삶의 노출광이다. 이들은 무대에서 누가 더 현란한 몸짓으로 무대를 장악하는가를 두고 경쟁한다. 일례로 에이즈 환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모임에서 의원 뒤베르크와 지식인 베르크의 일화가 이들의 면모를 증명해 보인다.(베르크의 에이즈 환자와의 입맞춤, 뒤베르크의 잠깐의 영원 같은 주저함, 이를 포착하는 카메라) 그렇게 이들은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처럼 다듬으며, 궁극적으로는 그 작품이 불멸의 전당에 오르기를 염원한다. 이들의 관객은 TV 뒤에 있는 비가시적이고 추상적인 대중이다. 이 보이지 않는 가상의 관객 앞에서 춤꾼들은 도덕적이고 명예롭고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한다. 동시에 그런 자신이 통속성에서 벗어나 위대하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들의 나르시시즘적인 도취를 작가는 즐겁게 묘사하는데, 이를 실천하거나 추종하는 인물들은 뒤베르크와 베르크(이름이 비슷한 둘은 사실 쌍둥이 같은 캐릭터이다), 그리고 성이 체호르집스키인 체코의 곤충학자이다(책에서는 계속 체코 학자라고 언급된다). 우리는 모두 카메라의 발명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춤꾼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자연스럽게 느낀다. 또한 언젠가 명예의 전당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쓸데없는 걱정을 가지고 사는데, 이 잠재태는 실제로 우리 삶의 일부분을 변화시킨다.


허나 모든 이들이 도덕을 표방하는 삶의 노출광인 것은 아니다. 소규모 대중을 대상으로 공연을 하는 춤꾼들이 있다. 바로 퐁트벵이며, 청년 뱅상이 그를 추종한다. 퐁트벵은 타고난 외연, 즉 목소리와 카리스마로 작은 무대를 장악하면서 TV 속의 다른 춤꾼을 조롱하기도 한다. 이러한 조소는 그와 다른 춤꾼과 차별화하면서 그를 춤꾼들의 대 이론가 반열로 격상시킨다. 이들은 비도덕적인 말, 성적인 금기어를 내뱉을 때마다 대중으로부터 극찬과 지지를 받는다. 제자 격인 뱅상은 스승에게 당신도 다른 종류의 춤꾼이 아니냐며 반항을 하려고 하지만, 그의 뻔뻔한 태도에 이만 수그러들고 만다. 이들의 특징은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이를 통해 자신뿐 아니라 자기 눈앞에 있는 대중의 숨은 욕망과 희열을 스스럼없이 자극하는 것이다. 이들은 대중과 함께 통속성 안으로 다이빙한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는데,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어설픈 모습을 보이면 대중은 표정이 돌변하면서 바로 그를 비웃는다. 마치 물이 다 빠진 수영장에 다이빙을 하는 것처럼 우스운 모양새가 되어버리는 것은 한순간이다. 사회에 첫 발을 디딘 우리의 뱅상의 최후를 보라!


후반부에 가면 작가는 이들을 신랄한 어투로 놀리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의식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밀란쿠, 제발 농담 좀 그만둬. 진지함이 우리를 보호해준단다." 예컨대 어떤 토론에서 사력을 다해  열변을 토하는 반대편 인물보다도, 한 발치 떨어져 그것을 농담화 하면서 이죽거리는 논객에게 더 적개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시니컬한 농담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필자가 예전부터 들어온 주옥같은 말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진지함은 지지자들을 만들고 농담은 적을 만든다.


우울한 긍지

위에서 우리 모두에게는 춤꾼이 깃들어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속성은 체코에서 온 60대 곤충학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비련의 대 학자인 것처럼 보이는 인물에게도 각자의 사정이 있다. 1968년 소련의 침공 후에 그는 다른 동유럽 지식인들처럼 약 20여 년을 노동현장에("수용소"라는 말을 체코 학자는 한사코 거부한다) 끌려갔다가, 체제 붕괴 이후 다시 곤충학회에 파리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러 돌아온 참이다. 그러나 그의 수감 이유는 반항적인 자유 의지가 아니라 단지 한순간의 용기 없음 때문이었다는 것은 그만이 아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쿤데라의 첫 작품 <농담>의 인물들이 단순히 던진 제스처 하나에 의도치 않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겪었듯이, 이것은 그를 곤경에 처하게도 하지만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체코 학자의 무력하고 용기 없는 행동은 80년대 좌파 지식인 춤꾼들이 극찬하는 의지적인 행위로 칭송받는다. 그는 미디어라는 신의 은총을 받고서 조명이 밝게 올려진 순간에 제때 무대 위에 올랐다고 느낀다. 드디어 단상에 오르는 순간에 그는 감격에 찬 연설을 하고 학계 동료뿐 아니라 서유럽 지식인들까지도 감동시킨다. 남들을 감동시킨 나 자신에게 감동받는 것, 쿤데라의 키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는 감격의 순간을 만끽하고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을 빼먹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실수는 아카데미 시상식으로 올라가다가 드레스를 밟고 엎어졌을 때의 그 민망함을 자아낸다. 하물며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넘어진다면? 어쨌거나 인간은 늘 실수를 하고, 창피한 순간을 만회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리고 허튼짓을 하면서 긁어 부스럼을 낸다. 이불 킥을 하는 것으로는 모자라, 우리는 그 모멸감을 잊기 위해 전력 질주한다. 그리고 이제는 기계에 속도를 위임하고 속도의 엑스터시를 맛보며 망각의 강도를 더 세게, 세게 높인다. 그러나 이 또한 다 지나갈 것이다. 아마도 후대에서는 각본에 따라 연출된 모습을 역사로 기억할 것이며 이 조차도 무관심 속에 잊힐 수 있다. 음악적인 비유를 탁월하게 활용하는 작가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비유를 제시한다.

사람들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베토벤의 작품 138곡을 첫 여덟 마디만 이어서 듣는 것과 같다. 이것은 종국에 매우 길고 날카로운 하나의 음정, 베토벤이 귀가 먹던 첫날 들었던 음과 흡사해질 것이다.


쾌락주의의 이상은 실현 가능한가?

쾌락주의의 이상은 실현될 수 있는가? 여기서 에피고등학교 윤리 시간에도 배웠던 에피쿠로스 학파의 이론, 즉 고통이 없는 삶이 쾌락적인 삶이라는 이론이 등장한다. 이론에 따르면 쾌락은 너무도 쉽게 깨지고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기 때문에 최대한 절제되고 지속적인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 따라서 쾌락주의는 태생적으로 이기적이고 내밀하며 은폐되어 있다. 그렇다면 쾌락주의의 이상향은 인간 본성과 양립할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은 이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재차 언급하지만 우리에게 각자의 춤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세기 소설 <위험한 관계>는 이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쾌락주의 분석의 극치로 여겨진다. 인물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은밀한 쾌락의 탐닉이 아닌 정복욕, 즉 남에게 전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폭로에 대한 욕망이다. 에피쿠로스는 현명한 자는 투쟁과 관련된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쾌락을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으면 너는 숨어 있으라. 이것이 쾌락주의의 주문이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18세기의 관능은 그 느림에서 온다고 했듯이 T부인과 기사는 에피쿠로스가 설파한 원칙에 충실히 따른다. T부인의 사랑 속성 강의는 대략 다음의 내용을 포함한다. 비밀 엄수의 원칙, 그녀의 남편이나 정부가 알아서는 안 되거니와 기사가 본래 연모하고 있는 백작부인과의 어떠한 경쟁자 관계도 되지 않으리라는 명확한 선긋기. 그 후에서야 그녀는 입맞춤 하나에도 의미를 담으며 짧은 하룻밤을 아주 공을 들여 예술적으로 직조한다. 엄폐된 상태로 계획적이며 절제된 쾌락은 당사자들의 흥분 상태를 가장 오래 지속시킨다. 또 하나, 작가가 말하기를 연애에서 선택되었다는 것은 신학적인 감정이다. 어떤 모종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공덕 없이 받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 맺음이 다시 깨지게 되었을 때 신의 낙원으로부터 내쫓기는 듯한 감정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후에 T부인과 후작의 본 의도를 알게 된 기사가 맛보는 쓴맛은 이 예술적 경지에 이른 하룻밤으로부터 그를 퇴출한다(전락). 그가 이 무너져 내림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마치 달궈진 해수면이 천천히 식듯이 천천히 꺼지는 쾌락이기 때문이며, 끝까지 이를 음미하고 싶기 때문이었을 테다.

 

마지막으로, 스크린의 유명인사들에 대한 숭배를 통해서 이런 쾌락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망상가의 유형이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미디어 신을 믿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사이비 종교에 가깝다. 이러한 관계는 대상에게 영원히 다가갈 수 없었을 때에야 진가를 발한다. 헨리 키신저와 자신이 특별하고 은밀한 관계였다고 주장했던 여성에게, 진실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키신저가 그녀에게 보낸 경멸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그의 거절은 필시 '우리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정보 당국의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해석된다. 이들은 마치 <불멸>의 괴테와 베티나처럼 이들의 관계는 일방향적인 선망과 불멸에 대한 집념, 어긋남으로 '웃픈' 느낌을 준다. 끝까지 목소리를 내는 자가 역사 속에서 끝까지 생존할 것인가? 누가 불멸을 거머쥘 것인가?


믿을 것은 육체뿐

우리는 춤꾼들을 늘 비웃지만 그들에게 묘한 패배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외에는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자신감의 원천이자 믿을 구석이란 본인이 생각하는 육체의 매력뿐이다. 뱅상은 곤충학회에서 자신이 투명인간 같다는 것에 1차적으로 자존심이 상한다. 그의 모멸감이 절정에 이르는 것은 파티장에서 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버린 어떤 남자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베르크 일당(춤꾼들)을 조롱하는 뱅상에게 그 남자는 <인간 조건>에 대해 말하며 반박하였고, 뱅상은 이를 되받아치지 못한 것에 극도로 분개한다. 그는 그 방 안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인 줄리와 함께 모두를 농락할 멋진 퍼포먼스를 꾸민다. 그러나 관객을 가정하는 쾌락은 결코 관능적일 수 없다. 카메라맨과 감독, 스태프들이 가득 찬 곳에서 러브씬을 찍는 배우들이 이런 기분일까. 심지어 카메라와 관객마저도 뱅상에게는 잠재태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육체는 우리를 배반한다!


한편 체코 학자는 아까의 실수를 회복하기 위해 노동현장에서 다져진 자신의 멋진 늙은 몸을 전시하러 출발한다. 그는 실수를   외에도 초대한 이들의 문화적인 감수성 없음(culturally insensitive) 때문에  번을 우울해져 있었기 때문에(베르크가 찬양하는 것은 '동구권 지식인의 저항'이라는 추상화이며 나라와 수도를 헷갈리는 것만큼이나 사실은 그의 무지와 무관심을 드러낸다.) 그의 자아 효능감을 올려줄  있는 것은 노동으로 다져진 체력과 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문화 과잉" 서유럽 지식인들에게 자국의 긍지가 녹아있는 육체의 신성함을 알리러 떠난다. 그리고 베르크에게서 거절당하고  다른 퍼포먼스를 꾸미고 있는 임마쿨라타가 카메라맨을 대동하고 같은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편에서는 뱅상과 줄리가 벌이고 있는 퍼포먼스가 있다.  모든 인물들이  공간에서 부딪히고 서로 놀라고 오해하는 모습은 희극 드라마의 절정과도 같다.


전락, 그 이후

이제 한차례의 소동이 끝나고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새벽이다. 18세기의 기사와 20세기의 뱅상이 프랑스 고성에서 조우한다. 이들은 각자 "멋진 하룻밤을 보냈다"라고 서로에게 말한다. 그러나 실은 하룻밤을 대하는 두 인물의 태도는 극명히 대비된다. 먼저 뱅상은 퐁트벵을 포함한 자신의 무리로 돌아가 이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하룻밤을 어떤 거짓말로 포장하여 전할지 고민한다. 그는 마치 배우가 된 것처럼 리허설을 한다. 그러나 18세기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기사와 마주쳤을 때, 그는 그의 무관심을 본다. 나아가 뱅상은 아무도 자신의 허구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없을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밀려오는 후회와 부끄러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는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작가의 눈길이 끝까지 머무르는 것은 뱅상이 아닌 18세기 기사의 의연한 태도이다. 뱅상처럼 기사는 천천히 그의 마차로 다가가서 몸을 싣는다. 그러나 몰아로 도망치는 대신 그는 편안한 자세로 졸음에 빠져들며, 그곳에서부터 최대한 서서히 퇴장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빛 속에 녹아들고 있는 이 밤의 가장 가까이에 머무르고자 노력할 것이다. 내일은 없다. 청중도 없다.

이 허전하고 달콤 쌉쌀한 감정 안에 그는 여유롭게 침잠한다. 자신을 우습게 만들어버린 T부인과 공모자 후작에 대한 어떠한 복수심도, 폭로의 정복 욕구도 품지 않는 것은 지난밤의 관능적인 정경을 간직하고자 함이다. 실존 수학의 공식은 간단했었다. 어떤 추억을 떠올리는 이는 아주 천천히 느린 걸음을 뗀다. 이러한 추억과 사유가 가능한 느림의 미학, 남모르게 간직되어 조개껍질 안에 갇혀 있어 서로 공명하는 이야기들, 이 씁쓸함마저 받아들이는 방랑객들은 현대에 와서 모두 어디로 갔는가? 이것은 작가가 현대 사회 풍속에 던지는 비판도, 도덕적인 설교도 아니다. 되려 그리움에서 온 작은 탄식이라고 할 수 있다. 쿤데라식의 한바탕의 웃음이 지나간 후, 결말에서 느껴지는 작고 쓸쓸한 향수는 <느림>이라는 책 안에서도 감미롭다.


이미지 출처

https://www.amazon.fr/Lenteur-Milan-Kundera/dp/2070192067
https://www.abebooks.com/servlet/BookDetailsPL?bi=22817696633&searchurl=sortby%3D17%26an%3Dkundera%2Bmilan%2Btranslated%2Bby%2Blinda%2Basher

2021년 3월 5일 읽음 / 2021년 4월 4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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