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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ine Oct 22. 2020

잉마르 베리만, 화니와 알렉산더 (1982)

만질 수 있어도 헤아릴 수 없는 인간에 대하여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단지 재미만을 추구하지 말라 (EL BLOT TIL LYST)

오래 잔상이 남아있던 <페르소나> 이후에,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화니와 알렉산더>를 보았다. 이 영화는 어린시절에 대한 베리만의 이상향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사색을 엿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원래 320분짜리 스웨덴의 TV 시리즈였다가 188분짜리 영화로 리메이크 되었는데, 때문에 3시간 8분이라는 긴긴 런닝타임을 자랑한다. 슈만 피아노 퀸텟 Op.44 2악장을 배경으로 영화가 시작되면, 아름다운 인형극 무대 현판에 'EL BLOT TIL LYST(단지 재미만을 추구하지 말라)'라는 의미심장한 라틴어 현판이 보인다.

출처:https://www.frieze.com/article/fifteen-moments-lightness-ingmar-bergmans-fanny-and-alexander


질서/일상/사랑이 넘치는 작은 세계

영화는 크게 3부로 나뉜다. 그 중 1시간을 훌쩍 넘는 비중을 차지하는 제 1부는 에크달 가족이 보내는 지극히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여준다. (1부의 약간 느린 페이스를 견디면 2부와 3부에서 어마어마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파티를 주재하는 할머니인 헬레나부터 그녀의 아들인 구스타프와 알마 부부, 오스카와 에밀리 부부, 이들의 자녀인 알렉산더와 화니, 할머니의 오랜 친구이자 그녀를 짝사랑하는 랍비 아이작, 마이를 비롯한 하녀들까지, 집안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복작대면서 그야말로 부족할 것 없는 스웨덴 귀족 집안의 명절 풍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내가 겪어본 적이 없는 이국적인 풍경에조차 향수를 갖게될 정도로 베리만이 연출해낸 크리스마스 풍경은 동화처럼 몽환적이고 평화롭다. 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도 하나같이 성격이 착하고 어떨 땐 바보 같을 정도로 심성이 섬세하고 여린 편이다. 예컨대 알마 같은 경우는 자기 남편 구스타프가 하녀인 마이에게 대놓고 추근덕 거리고, 카페 차리라고 돈 쥐여주고, 아기까지 낳는데도 매우 아무렇지 않아하는 대범미와 쿨내를 풍긴다(...)


이 크리스마스 파티의 절정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에크달 가족은 오스카가 지배인으로 일하는 극장에서 크리스마스 기념 성탄 연극을 올린다. 보통 다른 영화 같으면 주로 어린아이들이 성경 속 인물들과 천사 분장을 하고 크리스마스 연극 무대 위에 올라가든가 하는데, 이 가족은 특이하게도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연극 무대에 올라간다. 마치 헬레나의 말처럼,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맡는 한판의 연극을 하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객석에는, 일개 가족 연극을 보러왔다기에는 수없이 많은 군중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이 모습은 약간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이 장면은 이들 연극의 관객이 불특정 다수, 즉 '세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즉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한 편의 연극 무대를 올리며 살아간다는 것 일지도..


연극이 끝나고 오스카가 가족들 앞에서 기념 연설을 하는데, 감독이 인물의 입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대신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설명용 대사는 저리가라 할 정도인데, 이 대사가 마치 체홉의 희곡 한 대목을 보는 것 같았고, 한문장씩 곱씹을 수록 아름다웠다.

이것도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면 제가 가진 유일한 능력은 이 극장 벽에 둘러싸인 작은 세계에 대한 사랑 뿐입니다. 전 이 작은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밖에는 커다란 세계가 존재합니다. 작은 세계는 우리가 커다란 세계를 잘 이해할 수 있게 그 모습을 비춰주기도 합니다. 혹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잠깐 동안이나마 냉혹한 바깥세상을 잊게 해주죠. 우리 극장은 작은 방이며 질서, 일상, 사랑이 넘칩니다.

이렇듯 질서, 일상, 사랑이 지배하며, 인간성이 넘쳐 흘러서 계급마저도 그 경계가 흐려지고, 각자의 부족함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용서와 웃음이 따르는 세계는 어린 알렉산더에게 절대적인 세상이다. 가족들은 할머니의 화려하고 미로같은 집에서 화려한 옷들을 입고 손잡고 뛰어다니는데 여기서 할머니집의 스케일을 알 수 있다. 아래 사진처럼 대식구가 손잡고 뛰어댕기려면 대체 얼마나 넓어야 하는 것인가? 즉 작은 세계는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다 ㅎㅎ

여담으로, 세트장에서 그 많은 촛불들을 켜고 안 꺼지도록 유지하느라 정말 스탭들이 고생했을 것 같다.

출처: https://www.eastman.org/fanny-and-alexander

아무튼 간에, 감독은 셰익스피어 인용(햄릿 모티브)과 성경의 알레고리를 명징하게 인용한다. 유령 연기를 특히나 못했던 아버지 오스카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가족들에 곁에 가까이 있을 것이란 말을 남기고 죽는다. 아버지가 이뤄놓은 작은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자 에밀리는 짐승의 것과 같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는데, 아이들이 아버지의 관 옆에서 절규하는 엄마에게 서서히 다가가는 장면은 이 영화의 숱한 명장면 중 하나이다. 그녀가 오스카의 장례를 주관한 주교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되면서 알렉산더, 화니, 그리고 에밀리는 오스카가 말했던 냉혹한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현실 세계의 두 얼굴

이제 제 2부가 시작되었다. 베리만이 그리는 이 냉혹한 세상이란 무엇인가?

픽션이 금지되는 세상이다. 주교와 알렉산더가 직접적으로 첫 대면하는 것은 거짓말로 인해 면담하는 장면이다. 알렉산더는 학교에서 '엄마가 나를 서커스에 팔 것'이라고 말하고 다녀서 주교에게 불려가 상담을 받는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냐고 묻자 '이익을 위해서'라고 알렉산더는 대답하고, 이에 대해 주교는 아주 똑똑하다며 칭찬을 한다. 그가 인식하는 거짓말의 본질을 알렉산더의 입으로 들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알렉산더가 앞으로 하게 되는 거짓말은 현실의 구체적인 이익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 알렉산더의 거짓말은, 어떠한 수단이 되는 거짓이 아니라 진실로 다가가기 위한 거짓말에 가깝다.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잘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주교의 집은 에크달 가문의 집과는 정 반대로 수도원처럼 삭막하고 음침하며, 쇠창살과 자물쇠로 잠겨있는 폐쇄적인 공간이다. 알렉산더는 여기서 두 번째 거짓말을 해서 주교에게 벌을 받는다. 알렉산더는 이 집에서 오래 전에 죽은 어머니와 두 자식에 대한 사연을 본인이 지어낸다. 이 이야기는 먼 과거의 일인 것 같기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모든 개연성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알렉산더의 이야기는 마치 숨겨져 있던 진실이 드러나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청자를 압도하고, 그들이 설득 당하고 믿게 만드는 힘을 지고 있다. 그것이 작은 세계에서 온 픽션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알렉산더의 행동은 결국 주교의 심한 핍박을 받는다. 소년은 매질 당하고 다락에 갇히고, 에밀리가 헐레벌떡 들어와 문을 따고 들어가서 누워있는 아들을 품에 끌어안는 씬은 정말 아름답고도 비장미가 흐르도록 연출이 되었다. 저 뒷편 십자가에서 끌어 내린 것처럼 옆으로 기울어져 있는 십자가와 쓰러져 있는 소년, 그리고 아들을 부둥켜안으며 흐느끼는 어머니는 잉마르 베리만이 재해석해낸 숭고하고 아름다운 '피에타'다.

출처: https://www.frieze.com/article/fifteen-moments-lightness-ingmar-bergmans-fanny-and-alexander

주교의 집은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곤궁함, 폭력, 훈육과 억압으로 점철된 냉정한 현실세계의 모습을 상징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 삶의 병적인 부분을 가리고 어떤 다른 이야기로써 풀어낼 여지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 앙상한 뼈대만 남은 현실은 얼마나 초라한가, 우리는 얼마나 비참해지는가를 말하려던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잃어버린 작은 세계는 아버지의 유령이 되어 계속 가족들의 곁을 맴돌다가, 헬레나(할머니)에게 에밀리와 아이들을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결국 알렉산더와 화니, 에밀리가 탈출하는 과정에서는 갑자기 영화의 속도와 몰입감이 극적으로 상승한다. 헬레나를 통해 소식을 들은 랍비 아이작이 경제적으로 파산 직전인 주교에게서 궤짝을 사겠다고 해서 아이들을 그 속에 싣고 탈출하며, 아이들은 서커스에 인형을 만들어 파는 아론의 집에 맡겨진다. 즉 여기서 '엄마가 나를 서커스단에 팔아넘긴다'고 했던 말도 안 되는 알렉산더의 거짓말이 마치 선지자의 예언처럼 들어맞게 되는 역설이 일어난다.


주교의 집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이 집은 마치 귀신의 집같기도 한데, 주교의 집이 모든 것이 금지되는 곳이었다면 이 집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혼돈과도 같다. 금욕적인 현실세계였던 주교의 집과 마찬가지로 이 집에도 병자가 있는데 동생 '이슈마일'이다. 주교네 집에 있는 뚱뚱한 숙모가 사지가 마비되어 아무것도 못했다면, 이슈마일은 상당히 파괴적이고 악마적인 모습을 보여서 아이작은 그를 병자라고 호명한다. 빛의 세계의 엄격한 종교/사회적 질서가 보여주는 불능, 그리고 그 이면에서 카오스적 세계가 갖는 파괴력. 둘 다가 우리 세계 속에서 은둔하고 있는 병적인 모습이다.

출처 : http://www.janusfilms.com/films/1121

마치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불길하고 악한 생각들이 넘쳐서 현실에 도달하듯이, 이슈마일이 뒤에서 알렉산더를 끌어안고 있을 때 주교네 집에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다. 걷지 못하는 자(숙모)가 걷게 되고, 에밀리를 지배하려고 했던 자들은 바로 같은 방법으로 통렬하게 복수당한다. 이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는데, 차라리 알렉산더의 머릿속 상상이었다고 하는게 오히려 더 납득될 정도이다.


특히 경찰들이 찾아와 얘기좀 듣더니 "불운과 우연의 일치"였다고 결론내는 장면은 통상적인 플롯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뒤통수 치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가 익숙한 줄거리를 가진 영화였다면 아마도, 경찰이 이러한 진실을 외면하고 진범 찾기에 골몰하여 에밀리를 방화범이나 살인범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스터리한 동화이자 세상에 대한 우화이므로 사건은 허무하게도 우리 주인공들 편으로 깔끔하게 종결된다. 현실이건 상상이건, 어쨌든 어둠의 시절은 끝나고 이들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행복한 작은 세계로 회귀한다.



만질 수 있어도 헤아릴 수 없는 인간

에밀리, 알렉산더, 화니는 두 얼굴을 한 세상의 시련을 겪고 다시 에크달 가족의 작은 세계로 돌아오는데, 이것이 영화의 피날레이자 제 3부라고 할 수 있다. 에밀리가 임신한 두 쌍둥이 아기가 태어나고, 가족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에밀리와 아기들을 맞이한다. 이들은 에밀리의 실패한 결혼과 이미 일어난 비극에 대해서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는 굉장한 쿨함을 보이는데, 마치 이들은 불행이 일어났다는 그 사실보다도 불행이 끝나서 에밀리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더 기쁨을 느끼는 것 같다.


1부에서 우리는 쓸쓸하고 멜랑콜리한 오스카의 연설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마치 베토벤의 교향곡이 '어둠에서 광명으로' 마지막 피날레를 향해 나아가듯, 구스타프가 감상에 젖어서 기쁨 어린 연설을 한다. 이 대사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긴 대사 그대로 인용해본다.

에크달 집안 사람들은 세상을 분석하러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럴 생각 마세요. 우린 그런 체질이 아닙니다. 거창한 문제는 무시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린 작은 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거기서 만족하고 최선을 다해 그 삶을 가꿔야 합니다. 갑작스레 죽음이 찾아옵니다. 갑자기 심연이 입을 벌리고 폭풍이 몰아치고 재앙이 닥쳐올거라는 걸 우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언짢은 것들은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핑계를 좋아합니다. 핑계마저 금지시키면 우린 미쳐버립니다. 인간은 명쾌한 존재일 겁니다. 그래서 우린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겠죠. 우린 현실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명쾌한 판단력으로 세상의 단조로움에 불평할 수 있죠. 훌륭한 예술가님들, 슬퍼하지 마십시오. 배우 여러분, 우린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영적 전율을 주는 건 여러분입니다. 가장 심오한 즐거움도 주지요.

세상은 도둑들 소굴이고, 밤은 다가옵니다. 악이 사슬을 끊고 미친개처럼 세상을 휘젓습니다. 그 독성이 에크달과 모든 사람들을 파고듭니다. 누구도 도망칠 수 없어요. 갓 태어난 헬레나 빅토리아도, 오로라도.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행복할 때 행복을 느낍시다. 사랑하며 친절하고 너그럽게 삽시다. 이 작은 세계 안에서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맛있는 음식, 부드러운 미소, 꽃이 핀 과일 나무, 왈츠.

사랑하는 여러분, 제 얘기는 끝났습니다.

구스타프의 입을 통해 감독은 또다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이 작고 즐거운 세계 안에서 행복하고 친절하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허구적인 거짓말을 지어내고 짜여진 한 판의 연극을 하면서 여러 가면을 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쓰는 가면이 너무 많아서 진짜 나자신이 누군지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 스스로의 본질을 기억해내야 한다. 모든 가면을 버리더라도 그것이 내 진짜 얼굴인지, 어떤 페르소나와 혼연일체 되어버린 괴물같은 나 자신인지 고민해야 하는게 바로 우리의 처지인 것이다. 만질 수 있어도 헤아릴 수 없는 인간.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너머의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불행과 죽음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이 찾아올 때 행복을 느껴야 한다. 남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워야 한다. 현실과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끝까지 작은 세계를 지켜야 한다. 때로 우리는 화니와 알렉산더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냉엄한 현실과 끔찍한 혼돈 속으로 떠밀려가기도 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잔상이나 트라우마(아버지의 유령), 그리고 떠나온 현실세계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주교의 유령)을 안고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신나게 과자상자를 가지고 신나게 달려가다가 유령과 부딪혀 쓰러진 알렉산더처럼. 그러므로 이 작은 세계 안에 머물되, 즐거움만을 추구하지 말라. 모든 유령은 어디에서나 너를 지켜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메시지는 깊은 울림을 준다.


모든 게 가능하고 개연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헬레나가 알렉산더에게 읽어주는 '꿈'이라는 희곡의 한 부분을 옮기며 글을 마치려 한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게 가능하고 개연성이 있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얄팍한 현실의 틀 위에 상상은 새로운 무늬의 천을 짠다.

이 대사는 나의 뇌리 속에 깊게 박혀 있는데, 영화적인 맥락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타인과 내가 인식하는 '개연성'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느낀 바가 있어서 이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개연성과 당위로써 남을 단죄하지 말자는 정말 당연하고도 어려운 이야기이다. 사실 나는 상당히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범위의 삶을 살았다. 물론 성장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불행들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나는 늘 착한 학생이었고 성실한 자녀, 좋은 친구와 동료, 이러한 주어진 역할에 착실했기 때문에 별다른 갈등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의 행동은 내가 예측하고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에, 타인을 깊게 알려고 할 수록 이해할 수 없는 지점들이 보였다. 같이 부대껴 지낼 수록, 우리를 방해하는 기막힌 우연과 서로에 대한 몰이해가 수시로 갈등과 미움의 원인이 되었고, 나는 그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질타하고 몰아세웠다. 하지만 나도 한없이 부족한 인간인지라 때때로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고는 했다. 이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깨지고 상처받고 나서야, 나는 내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 타인에게는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내가 저지르기도 한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그럴 수 있지'의 태도를 견지하는 순간에, 사랑하는 이와의 유대감은 더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순간 선순환으로 다시 나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간단한 원리이다. 우리의 실수와 부족함과 어쩌면 병적인 부분에 대해 너그럽게 인정하며 사는 것 만으로도 삶이라는 연극은 금방 막을 내릴 것이다. 두꺼운 가면을 걷어내고 내 피부에 가장 가까운 페르소나를 보여줄 수 있는 나의 사람들과 함께, 아직은 황폐화 되지 않은 이 작은 세계에서 오랫동안 머물기를 기원한다.


[Eurofilm 1. 스웨덴, 프랑스, 독일] 

이 영화 도입부에 알렉산더가 인형 무대를 보다가 문득 뒤돌아서 아무도 없어서 가족들을 소리쳐 부르는 장면이 있다. 영화 맨 마지막에서 헬레나가 <꿈>이라는 희곡을 읽으며 알렉산더가 잠이 들었고, 그가 눈을 뜨자 꿈의 내용이 펼쳐지면서 희곡 속 인물들(가족)이 등장한다는 '메타 극'으로 해석할 여지도 충분히 있는 것 같다. 모든게 가능하고, 개연성이 있으니까.

2020년 8월 9일 감상/ 2020년 10월 21일, 다시 정리하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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