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죽은 자들이 살려낸 아이
2차 대전 중 가장 격렬한 대 나치 공산 게릴라 활동을 벌였으며 그에 따라 가장 큰 인적 손실을 낳은 곳은 소련, 그리고 폴란드, 유고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다. 체코와 헝가리는 한 때 서유럽과 같은 융성한 문화 강국을 꿈꾸기도 했으나, 양차 대전과 소련의 침공을 겪으며 그러한 꿈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겪은 민족에게 홀로코스트를 다룬다는 것은 미국이나 서유럽의 입장과는 결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에는 아직도 뿌리깊은 상흔과 집단 트라우마가 사라지지 않았고, 가리거나 미화하기에는 영화의 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이들은 이 영화를 <인생은 아름다워>, <피아니스트>, <쉰들러 리스트>와 같은 기존 홀로코스트 영화에 대한 비판이자 안티테제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링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아들> 또한 홀로코스트 안에서조차 희망을 붙잡는, 아니 불완전한 희망이라도 만들어내고야 마는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점은 여전하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많은 고민과 성찰을 담은 영화가 이번에 소개할 <사울의 아들>이다. 네메스 감독은 헝가리 출신의 감독이며, 무려 이 영화가 데뷔작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실제 '존더코만도'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많은 부분 기반한다. 영화의 가장 첫 장면은 '존더코만도'에 대한 정의로 시작한다.
강제 수용소 내에서 특수 수용자 집단을 지칭하던 용어로 "비밀 운반자"라고 불리기도 하였음. 이들은 나머지 수용자들과 분리되어 생활하였으며 대개 몇 달 노역 후 처형되었다.
달리 말해 존더코만도란 수용소 안에서 잡역을 하던 말단 노역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수용소가 포로를 수용하고 학살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노역을 제공했으며, 학살이 끝나면 뒤처리를 담당한 '시체 처리반'이었다. 이 영화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에서 벌어진 존더코만도의 봉기(실제 있었던 사건)와, 여기에서 이탈하는 듯 함께 끌려가는 사울이라는 한 존더코만도의 행적을 함께 보여준다.
4:3 비율의 화면을 꽉 채우는 사울의 등과 어깨가 보이고, 그의 등에는 페인트로 붉은색 X 표시가 되어있다. 사울을 제외한 모든 배경은 아웃포커스로 처리된다. 마치 차마 보지 못할 것을 오래 본 사람의 정신이 흐릿해지듯이. 하지만 우리의 시각이 흐려진 대신에 다른 감각들이 서서히 이 빈자리를 채운다. 비명 소리, 벽을 두드리는 소리, 울부짖음과 절규, 이 모든 끔찍한 사운드가 점점 고조되며 서서히 뜨거워지는 영화 속의 공기가 느껴진다. 마치 비릿한 피 냄새를 맡는 듯하다. 이곳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인간은 부품이 되어 악의 기계를 돌린다. 사울이 이 수용소 안에서 저렇게 자기 마음대로 작업장을 옮겨가며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디에나 잘 맞는 부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설정이 조금은 작위적이어서 몰입을 방해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감독은 본인의 의도를 명확히 했다. 청소를 하라면 즉시 하고, 삽을 뜨라면 뜨고, 갑자기 투입되어서 열쇠를 딸 수 있는 사울은 지옥의 기계를 돌리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사울이 상황 판단이 빠르고 유용하다는 것을 안 덕분에 동료들이 그의 목숨을 여러 번 살리기도 한다.
반대로 나치에게는 사울이나 다른 수용자들이 무차별한 가축, 혹은 부품으로 보였을 것이다. 따라서 적재적소에 잘 기능만 한다면 살려둘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나치가 사울을 갑자기 부르는데, 그동안 사울을 따라가며 그에게 동화되고 있던 우리는 심장이 덜컥, 하지만 사실은 식탁을 치우라고 한 게 전부였던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가축처럼 도살되고, 또 다른 인간은 가축처럼 노역하다 도살되는 광경을 우리는 사울처럼 절망스럽고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지옥은 모든 인간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가장 효율적이며 경제적인 지옥이기 때문에 더 경악스럽다. 반인륜적 범죄가 자행되고 있다는 점만 빼면 수용소는 아주 훌륭하게 잘 돌아가는 공장인 것 같은 느낌도 준다. 또한 이 공장 시스템은 현대사회와 산업의 발전에 잘 부합한다.
유럽 전후사를 읽을 때 가장 역설적인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것이다. 많은 동유럽 출신의 유대인들이 이 잔인무도한 학살을 겪고도 독일에 남는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 이유는 연합군이 주둔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신변의 위협에서 안전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서유럽에 눌러앉아서 구직을 하고 개인적인 기회를 도모하기 위해서 남기도 했다.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역사는 바뀌었지만 시스템은 살아남았으며, 이는 전후 서독의 가파른 성장을 이끌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동유럽인들이 그 혜택을 받고자 독일 산업에 그들의 노동력을 제공했다. 어떻게 그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그럴 수 있는가는 의미 없는 질문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에. 그러나 본능과 생존을 따라 움직이다가도 내면에는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영화 내내 사울을 추동하도록 하는 힘은 죽은 그의 아들을 장사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산 자의 목숨도 위협하면서까지 죽은 아들의 장례를 치르려 하는 이 행동을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의 무모한 행동도 단지 광기 어린 집착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소년의 얼굴을 제대로 한 번도 볼 수 없으며, 그의 이름도 출신도 끝내 알 수 없다.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 아이였는지, 엄마는 지금 어디 있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무엇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규정짓는가? 단지 생물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아니면 아무도 하지 못한 희생을 무릅쓰고 그의 존엄을 지켜주면 아버지나 다름없는 것인가?
사울은 내가 저 아이의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저 아이가 죽었다"라고 말하다가 아주 간혹 가다, "이 아이는 내 아들이오"라고 은밀하게 '주장'하는 것이 전부이다. 영화를 보며 사울이라는 인물이 잘 이해되지 않고 그에게 완전히 이입할 수 없다면 동료조차 안중에도 없는 그의 비이성적인 행동뿐 아니라, 아들이 죽었음에도 눈물 한번 흘리지 않는 평정함도 한 몫한다. 오히려 그는 아들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장 평화로워 보인다. 과연 수용소의 삶이 그의 인간적인 감정마저 말살한 것인가? 영화 포스터의 '슬픔조차 금지된 곳'이라는 문구에 낚여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울은 슬퍼하기는커녕 점점 일말의 희망을 품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사울의 행적은 원래부터 부재했던 아들을 소생하는 의식이다. 혹은 절멸한 희망과 영원히 소각되어 사라질 미래를 다시 부르는 아주 처절하고 간절한 기도이다. 산 자는 죽은 목숨이고, 죽은 자는 다시 살 수 있다. 유럽을 수 천년 간 지배해온 종교가 상기되는 말이다. 그러나 부활 의식에 있어서 전쟁 이전의 전통과 종교는 기능을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울을 외면하거나, 배신했거나, 가짜 행세를 한다. 전쟁의 참화에 따라서 그의 뿌리를 상징하는 존재는 모두 불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사울이 이들을 지옥불과 난리통 속에 꺼내오는 장면은 정말 잊을 수 없이 처절한 장면이다. 하지만 사울은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잠시 존더코만도의 '옷을 벗고' 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의 등에서 서늘한 붉은 X자가 잠시나마 지워진다.
랍비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구하지 못한 사울은 맨 몸뚱이로 이미 죽은 아들을 지고 어딘가로 무력하게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 발걸음은 끝내 발버둥 치는 허우적거림으로 귀결될 뿐이다.
사울의 아들이 정신적인 한 축에 있다면 존더코만도의 봉기는 이 영화의 보다 현실적이고 유물론적인 다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의 일사불란한 계획과 실행이 없었다면 사울의 계획은 한낱 무력한 시도에 그쳤을 것이다. 아까 소련과 동유럽에서 저항 운동이 가장 거셌다고는 했지만 세심한 감독은 존더코만도의 봉기를 절대로 영웅적인 투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행동은 남이 당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정작 자신들의 차례가 되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심의 발로로 보인다. 즉 대의를 위하면서도 자기자신의 생존을 위해 비굴하게 타협하는 양측면을 다 갖고 있는 것이다.
중간에 잠깐 나오는 유대인 여성 또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봉기 계획에 가담할 수 있다. 사실 이 장면이 실화에 기반한 것이라고 해서 가슴을 울렸으나, 여성 캐릭터들의 비중이 적은 것은 항상 그렇듯 아쉬웠다.
지옥도 안에서는 어떠한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지가 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인간으로 살다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할 필요가 없다. 아니, 그렇게 성찰하는 호사조차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못함으로 인해 모멸감을 느끼는 인간의 감정에 주목한다. 아브라함이 사울의 행동을 보면서 짓는 오묘한 표정으로부터,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각성과 괴로움을 느낄 수 있다. 아브라함의 표정에는 산 자를 저버리고 죽은 자를 위하는 사울에 대한 분노, 숭고한 '척'하는 그에 대한 경멸, 그러면서도 스스로 느끼는 자괴감이 묘하게 섞여있다. 아브라함을 맡은 배우(레벤테 몰나르)의 연기가 참 인상적이었다.
사울이 혼자 발버둥 치는 듯 하지만 모든 상황의 도움으로 치러낸 이 부활의 의식은 결국 한 작은 남자아이를 소환한다. 어디로부터 온 아이인지도 모르고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부모 없이 혼자 떠도는 이 아이는, 사울이 떠나보낸 아들이 다시 귀환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아이의 존재는 완전히 파괴되고 재건된 유럽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누구의 아들인지는 모르나 안도의 미소를 짓게 하는 존재. 저절로 살아남은 아이가 아니라 모두가 발버둥치면서 살려낸 마지막 아이, 유일한 희망.
2차대전 중에는 수백만명의 유럽인들이 국경 너머로 강제 이송되면서 새로운 땅에 정착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점령 중 소련군과 독일군이 자행한 성폭행에 의해 수십만의 사생아와 혼혈아들이 태어났고 고아가 되어 거리를 떠돌았다. 전쟁이 끝나고는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던 독일인들이 본국으로 강제로 송환되던 중 수십만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 혼돈 속에서 살아남은 세대는 그 자체로 귀할 뿐이지 뉘 집 자식이든 중요하지가 않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세대가 전후의 유럽을 재건했고, 또 유럽의 번영을 보았다.
<사울의 아들>은 사랑하기엔 너무 힘든 영화였다. 하지만 참 영리하고 품위 있는 영화다. 이는 기존 홀로코스트 영화들에 경종을 울린다. 영웅적인 레지스탕스 신화는 유효기간이 만료된 지 오래고, 그간 많은 홀로코스트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전쟁 후 7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2015년에 제작된 이 영화의 화법이 신선하게 느껴진 건 왜일까? 단지 내가 관심이 없었던 걸까?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언제 적 홀로코스트야"라고 하기에는 아직 못다 한 얘기들이 많은 것 같다. 현대사는 늘 그렇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모두에게 말할 권리가 있고, 영화의 윤리에 대한 의무 또한 모두에게 주어진다. 중요한 것을 생략하지 않으며,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사울의 아들>을 보면서 인간성에 대한 가장 비관적인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모습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토막'들을 마치 도살장의 고기들처럼 나르는가 하면.. 한 아이의 장례를 치르고, 화약을 한 줌 훔치고, 목숨을 걸고 사진을 찍는 행위를 하는 인류. 그 의도가 순수하든 안 하든, 그 행위들이 누군가에 의해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기에 인류사의 가장 큰 비극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족 하나를 덧붙이자면, 이 영화처럼 고민과 성찰을 담아 역사의 결을 잘 재현하는 균형 감각을 한국사를 다룬 영화들에서도 반드시 견지했으면 좋겠다. 지나친 '국뽕'과 감정에 호소하는 민족주의 색채의 영화는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음에도 아직도 일부 한국 영화가 이런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냉철한 역사의식과 자의식, 그리고 영화 기법... 여러 방면에서 깨어 있는 좋은 영화가 더 주목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urofilm 2. 헝가리]
역사적 사실 및 배경은 토니주트의 포스트워 1945-2005를 참고.
2020년 10월 25일 감상 / 2020년 10월 27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