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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ine Nov 03. 2020

셀린 시아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

말할 수 없는 것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18세기 절대 왕정국가였던 프랑스에서는 회화에도 엄격한 통치 질서와 위계를 부여했다. 국가에서 프랑스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 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를 설립하여 절대 군주의 위상을 높이는 역사화, 종교화를 그리도록 장려했으며, 세속화, 풍경화, 인물화 같은 회화들은 그 아래 서열이라고 여겼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화가 마리안느처럼 대다수의 재능 있는 여성 화가들은 풍경화와 인물화를 주로 그렸으며 역사화와 종교화를 그리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18세기에 활동한 여성 화가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아델라이드 라빌-기야르(Adélaïde Labille-Guiard 1749-1803)나 마리 앙투와네트의 총애를 받았던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Elisabeth Vigée-Le Brun, 1755 -1842)처럼, 왕족 여성들의 초상을 그린 궁정화가들이 있었다. 또 프러시아 출신으로서 프러시아 왕족의 초상을 그렸으며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도 활동하면서 남성 화가들의 권위에 도전했던 안나 도로테아 테르부쉬 (Anna Dorothea Therbusch, 1721-1782)가 있다.


이들에 대한 아카데미 남성 화가들의 조롱, 그리고 디드로와 같이 계몽주의를 신봉했던 소위 '깨어 있는' 지식인들의 조력과 배신, 프랑스 대혁명의 열기 속에서 부침하는 운명을 볼 때, 당대 여성 화가들의 삶을 둘러싼 씁쓸하고 냉정한 현실을 느낄 수 있다. 마리안느가 바다에 빠진 이젤을 구하러 뛰어들 때도 배에 탄 남성들 중 누구도 도움의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수영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본인에게 스스로 구제할 능력이 있음을 자각하고), 또 자신이 섬에 온 목적이자 스스로의 숙명인 대상을 구하러 거친 바다에 뛰어든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공간은 그러므로 영화적으로 창조된, 시한부의 유토피아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이 섬은 남성들의 존재감이 없거나 거의 미미한 공간이다. 이 속에서 여성들 간의 사랑이 싹트고, 계급을 뛰어넘는 우정과 연대가 일어나고, 예술이 도약한다.


어떤 정경

첫 번째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서로에 대한 탐색을 시작한다. 모자가 점점 벗겨지고 엘로이즈의 머리카락, 목덜미가 살며시 드러나며 그녀가 절벽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뛰는 모습에 이어 불현듯 휙, 뒤를 돌아보는 장면으로 둘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들의 시선은 처음부터 은밀하고 강렬해서 언제부터 이들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판단할 수 없다. 그저 많은 시선을 주고받아서인가? 예전에 어떤 방송에서인가 두 남녀를 몇 분 동안 아무말 없이 응시하도록 했는데 둘의 호감도가 올라갔다나, 이런 실험이 있던 것 같다. 엘로이즈를 관찰하고 그리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둘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마리안느가 본 것은 엘로이즈가 있는 어떤 정경(un tableau)이었을 것이다. 엘로이즈라는 존재를 처음 마주한 그 순간은 절벽 위로 내달리다 아주 위태롭게, 그러나 자유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이다. 엘로이즈는 많은 장면에서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마치 엄청나게 거센 파도를 마주하고도 본인이 수영을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조차도 모르는, 그러나 수영을 하고 싶어 하는 순진한 아이처럼. 어떨 때 그녀의 뒷모습은 의연하고 도리어 내면에 지닌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마리안느는 초상화에 담을 엘로이즈의 모습뿐 아니라 내면의 풍경화를 함께 담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특히 회화적으로 묘사된 장면들은, 어쩌면 두 사람이 함께 지낸 시간들 중에서사랑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풍경들만을 포착하여 나열하여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반한 것은 아주 디테일한 그녀의 생김새 하나하나를 뜯어보기도 했지만, 그녀의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는 어떤 광활한 풍경을 목격할 때이기도 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표현의 현대인의 신화를 깨면서 롤랑 바르트는 연인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단상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처음 우리는 하나의 정경(un tableau)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첫눈에 반하기 위해서는(운명과도 같은 그 무엇에 휩싸여 넋을 잃는, 그리하여 내 책임이 아닌) 갑작스러움의 기호 자체가 필요하며, 또 이런 모든 대상의 배열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정경이기 때문이다. 막이 찢어지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 그 전체 속에 드러나 모든 시선이 쏠린다. 즉각적인 것이 충만한 것을 대신한다.
...
유리창은 마치 사랑할 누군가를 찾아 군중 속에서 헤매는 카메라 렌즈와도 같이 움직이다, 내 욕망의 그 어떤 정확함(?)에 의해 갑자기 움직이기를 멈췄다. 나는 앞으로 몇 달 동안 쫓아다니게 될 그 출현을 응시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주체로서의 자신을 상실하게 될 그 풍경에 저항이라도 한다는 듯, 다시 내 시야에 나타나야 할 때마다(이를테면 내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들어오면서) 나를 늦게 알아보는 척하거나, 신중함과 무관심이 배어든 자세로 조심스럽게, 최소한으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
정경이란 항상 시각적인 것일까? 아니 그것은 청각적인 것일 수 있으며, 또 그 틀은 언어일 수 있다. 나는 내게 말해진 한 문장을 사랑할 수 있다. 그 문장이 내 욕망을 건드리는 그 어떤 것을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치 추억처럼 내 마음속에 살러 올 그 통사론적인 형태(그 틀) 때문이다.

- <사랑의 단상> '황홀' 중

또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엘로이즈가 뒤집어쓴 망토나 입가에 두른 베일(voile)이 벗겨지듯, 각자가 오랜 습관, 오래 해왔던 생각들을 상대방에게 드러낼 때(dévoiler) 찾아온다. 둘은 직업과 결혼, 예술, 죽음, 그리고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나누고 어떤 단어나 문장, 음악과 소리들, 상대방의 어떤 도전적인 질문에서도 사랑을 느낀다.("혼자이면 자유로운 건가요?") 이런 순간들이 반복되면서 그 사람은 나도 모르게 내 안으로 잠입한다. 사랑을 깨닫는 순간, 내면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실패작

마리안느는 낮에 본 엘로이즈의 모습에 대한 파편적인 기억을 밤새 곱씹으며 초상을 완성해 나간다. 그림 속 엘로이즈는 그때껏 실제로 진 적 없는 온화한 표정을 짓고 얼굴에는 건강한 홍조를 띠고 있다. 하지만 이를 본 엘로이즈의 평가는 냉정하다. 생명력이나 현존은 없냐는 엘로이즈의 질문에, 그림에는 규칙, 관습, 이념이 있다는 마리안느의 항변은 기성세대의 그것들을 담고 있다. 마리안느가 현존 la présence (영화에서는 존재감이라고 번역)은 그저 진실되지 않은 순간들로 이뤄진다고 했지만, 엘로이즈는 어떤 감정들은 아주 깊다고 반박한다.


위에서 사랑의 단상을 쓴 롤랑 바르트는 오늘날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기독교적 담론은(만약 아직도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로 하여금 억제하거나 승화할 것을 요구한다. 정신분석학적인 담론은(적어도 그의 상태를 묘사하는) 그의 '상상계'의 장례를 치르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마르크스적인 담론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시 회화에서 사랑의 담론 - 특히 퀴어 여성들의 사랑의 담론-은 지극히 주변화되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고, 이러한 이념을 마리안느는 자신도 모르게 내재화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엘로이즈의 관점에 자존심이 상한 마리안느는 당신이 미술 비평가인 줄 몰랐다며 쏘아붙인다. 그러나 엘로이즈가 떠나자,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초상을 망쳐버린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며 뜨겁게 불타오르는 찰나의 순간은 잠시 뒤면 소멸해버릴, 스쳐 지나가는 정념이다. 그에 비해 규범화된 여성의 모습은 죽어 있음에도 영원하고 고귀한 것으로 칭송받는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듯 역사화, 종교화가 그 나머지 풍경화, 세속화, 초상화보다 우월하게 여겨지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아직 바깥세상에서 규범과 관습에 물들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에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뮤즈는 이제 살아 숨쉬고 있는 존재인 자신의 정체성과 현존을 주장하기 시작하고, 예술가에게 좌절을 주는 동시에 또한번의 기회를 준다.


시선의 전복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하는 것을 자원하여 마리안느는 두 번째 기회를 잡게 된다. 고립된 섬은 어머니가 부재하고 죽음이 유예된 일시적인 낙원이 되며,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깊어진다.

이제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차례다. 첫 초상을 그릴 때 둘의 훔쳐보는 시선이 평등했다면, 이번에도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평등함을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알려준다. 이는 특히 서로를 사랑하는 여성과 여성이 마주하고 있어서 가능할 수 있는 권력의 평등이다. 18세기는 권력관계가 기울어진 남성과 여성이 서로 자리를 바꿔 앉는다 한들 시선의 권력은 이동하지 않았다. 안나 도로테아 테르부쉬가 그린 디드로의 초상이 그러한 경우일 것이다.

(좌)테르부쉬의 자화상 (우)디드로의 초상

폴란드계 프러시아 출신의 야망 있는 여성 화가였던 테르부쉬는 일찍이 프러시아 황제 가문의 초상화를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의 초상을 그릴만큼 성공한 화가였다. 1766년에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 예술계에서 인정받고 왕립 아카데미에 입성하기 위해 베를린에서 파리로 간 그녀는, 당시 절대왕정과 아카데미의 배타적인 나르시시즘을 비판하고자, 신진 예술가들을 후원자들과 연결해주곤 했던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를 만난다. 디드로는 당시 여성화가들이 겪고 있던 성 차별에 대해 거의 처음으로 언급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계몽주의 철학자의 대표 주자이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미술비평의 지평을 연 디드로의 사회적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테르부쉬가 정작 아카데미 활동을 시작한 후에는 디드로의 혹독한 비평이 이어진다.


테르부쉬는 프랑스 여성화가들에게는 금기시되었던 역사화와 종교화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디드로는 테르부쉬의 그림이 규범과 관습 기준에는 한참 모자라다고 생각하면서도, "저 정도 하는 남자들도 많이 없지"라는 식으로 덧붙이기도 했다. 또한 테르부쉬가 그리는 여성들이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이상적인 미도 갖추지 못하여, '제우스가 변신 비용이 아까웠겠다' 같은 흔한 당시 남성들의 성적인 농담조도 섞었다.


결정적인 것은 디드로의 초상화를 그릴 때였는데, 한쪽 어깨를 드러내는 게 불편해서(?) 디드로가 스스로 누드모델이 되어 섰던 것이다. 디드로의 노출증인지, 성별의 권력관계를 뒤집으려는 나름대로의 철학적인 시도였는지, 무엇인지는 내 앎의 소관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테르부쉬가 화가로서 프로의 태도를 취하면서 끝까지 그림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테르부쉬의 태도 때문인지 이 그림을 그릴 때 '성적인 뉘앙스'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디드로는 자못 순종적인 여성화된 모습으로 보이는 것도 같다. 디드로는 후에 숱하게 쏟아진 테르부쉬와의 루머를 무마하기 위해 테르부쉬가 다시 프러시아로 떠나기도 전에 그녀에 대한 인신공격과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현실에서는 단순히 모델과 화가가 자리를 바꾼다고 해서 권력관계가 역전되는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단 한 번의 전복에 의해서 여성 화가들의 커리어와 삶은 한순간에 추락하기도 했다. 영화 속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18세기 현실의 냉혹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화가가 모델을 기분 좋게 하는 칭찬으로 인해 모델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이 터지는, 진정한 기쁨의 웃음이 번진다. 시선과 시선이 맞부딪힌 후에,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 모든 것은 끊임없는 서로에 대한 탐구 끝에 깨달은 사랑이 전제되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엔 어떤 오해나 불쾌함, 수치심의 여지도 없다. 따라서 권력과 시선에 대해 영화가 명확하게 주장하고 있는 바는 현시대에 와서 가능하게 된 담론이자, 앞으로 여성주의가 나아가야 할 명확한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스로 선택한 세 죽음

영화에는 세 죽음이 나온다. 먼저는 엘로이즈의 언니가 스스로 선택한 과거의 죽음. 그리고 소피의 낙태, 마지막으로 엘로이즈가 스스로 선택한 신화적인 죽음이다. 두 주인공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 마치 낙원에서 보내는 꿈같은 시간에는 소피의 임신과 낙태 이야기가 비중 있게 들어간다. 두 사람이 잊을 때쯤이면 소피가 직접 이 광경으로 그들을 '초대한다'. 이들이 한 장면에 담기는 씬들은 엘로이즈가 수녀원에서 느꼈던 그 평등함이 주는 안락함의 재현이며 더 완전한 형태이다.

소피는 다른 영화에서 혹시 주인의 눈 밖에 날까 봐, 혹은 낙태 자체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눈물을 흘리는 하녀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두 사람의 사랑이 중심축이 되지만 소피는 그 사이에서 소외되지 않으며, 오히려 마리안느의 예술이 또 한 번 도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준다. 낙태 과정 중 마지막 단계는 마치 목을 매다는 모습과도 같다. 약을 스스로 먹고 올라간 소피의 얼굴이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몸이 쿵, 하고 떨어진다. 제대로 된 의료 체계도 없는 18세기의 한 고립된 섬에서 낙태를 선택한 소녀에겐 죽음을 불사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죽음에 대해서 그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덧, 숨겨진 캐스팅 신의 한 수는 소피인 것 같다. 미간이 넓은 소피 특유의 표정이 약간은 왜곡되어 보여서 고전 회화적인 배경에 나오는 인물이 살아 나온 듯했다. 그리고 꽃 자수가 놓인 의상과, 수를 놓을 때 길고 검은 속눈썹, 발그레한 볼도 생명력이 넘쳐서 영화 속 인물이 꼭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만 같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고민 끝에 직접 작곡했다는 노래

시선과 시선은 서로에 대한 돋보기처럼 빛과 열을 응집하다가 드디어 점화된다. 불은 이내 꺼지고 엘로이즈는 쓰러지지만, 이 정경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처연하며, 결연하기까지 하다. 칠흑 같은 어둠과 찬 밤공기 속에서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 채로 엘로이즈는 서서히 타오른다. 이로써 어떤 안식처를 뜻하는 아궁이 불, 그리고 여성들의 연대를 통한 충만함을 느낄 수 있던 모닥불은 순간적으로 엘로이즈의 화형대가 된다.


잠시 바슐라르의 정신분석에서 불에 대한 몽상의 한 부분을 빌려와 본다. 바다가 엘로이즈에게 언니와 스스로의 죽음과 소멸을 상기했다면 불은 그에 반대되는 생명력, 소생, 사랑, 그리고 연대의 의미를 포괄한다. 영화 초반에서도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캔버스가 불로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그러나 이 느낌은 순간 너무 강렬해서 이대로 타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상념으로 이어진다.

불을 관조하는 인간에게, 불은 신속한 생성의 한 예이자 상세한 생성의 한 예이다. (중략) 더 빨리 변화하는 불은 변화의 욕망을, 시간을 앞당기고자 하는 욕망을, 모든 생명을 그 종말, 그 피안으로 나르고자 하는 욕망을 암시한다. 그럴 때 몽상은 진정으로 매력적이고 극적이다. 이 몽상은 인간의 운명을 증폭시킨다
...
이 특수하면서도 또한 매우 일반적인 이 몽상은 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결합하는,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 결합하는 하나의 진정한 콤플렉스를 결정짓는다 (=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
...
때로 영혼은 거대한 잉걸불 앞에서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의 작용을 느낀다. 절망적인 사랑의 내밀한 불꽃에 화상을 입은 단눈치오의 라포스카리나는 유리 굽는 도가니를 매혹된 눈으로 관조하다가 불타는 장작더미(화형대) 위에서 생을 마감하길 갈망한다. "불에 삼켜져,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으면!"

- 불의 정신분석 '불과 몽상.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 중

이런 엘로이즈의 가장 강렬하게 타오르는 감정을 마리안느는 포착한다. 그리고 내면에서 이들의 불이 서로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마리안느가 이 장면을 그리는 장면을 보지 못 했지만, 어쩌면 그녀는 그 한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해 내기 위해 붓이 스스로 그칠 때까지 수없이 많은 그림을 그리고 파기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초상의 완성

어느새 꿈같은 시간은 다 지나고,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두 번째 초상화는 첫 번째와 사뭇 다른 느낌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강인한 표정으로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으며 캔버스 너머의 누군가를 강하게 응시하는 듯한 엘로이즈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더 잘 알게 되어서, 그리고 엘로이즈 스스로 변했기 때문에 이 한 폭의 그림은 두 여성이 함께 성장하며 공동으로 탄생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마리안느는 이를 또다시 파기하고 싶다고 하는데, 이 그림으로 인해 엘로이즈를 결혼 제도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가 다시 떠올린 것이다.


둘의 언쟁 장면은 언뜻 보았을 때 마리안느가 도피라는 대안을 제시해서 가능할 법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신화적으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오르페우스(마리안느)의 억지 투정이며 책임 전가에 불과하다. 에우리디케의 죽음은 이미 그들이 만났을 때부터 운명 지어진 것이고, 둘은 마지막으로 한 번의 이별 인사를 하기로 서로 '합의'한 상태이다. 이로써 각자의 아름다운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 채 오르페우스는 시인의 운명을 살아가기로 한다. 그런데 갑자기 오르페우스가 이 약속을 무효화하자고 떼를 쓰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어떠한가? 엘로이즈가 결혼을 거부하고 둘이 도피하게 되면 두 여성은 각자의 사회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마리안느는 더이상 화가로서 명성을 높이지 못하며 엘로이즈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스스로 헤엄치며 생존하는, 그녀만의 성장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를 위한 초상, 그리고 자화상

마리안느는 이제 스스로를 위해 엘로이즈의 마지막 세 번째 초상을 그린다. 그리고 엘로이즈를 위해서는 자화상을 그려준다. 재미있는 점은 여기에서 엘로이즈는 원래 그렸던 초상화 그대로, 본인은 현재 누드로 누워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려준다는 점이다.

여성 화가들의 자화상은 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나 붓과 팔레트를 손에 든 모습으로 나타난다. 위에서 언급했던 테르부쉬의 경우 말년에 시력이 감퇴하여 모노클 안경을 쓴 모습을 그대로 그리기도 하였다. 이런 여성 작가들의 자화상에는 그림에 대한 열정과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하지만 마리안느가 그리는 자화상은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모두 내려놓은 한 여성, 그리고 연인으로만 제시된다. 계약을 맺고 섬에 들어와 결국 사랑하는 이를 결혼으로 밀어 넣은 화가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내던지고 그를 사랑하고 싶었던 마음을 마치 엘로이즈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반영한 마냥...

르 브룅과 테르부쉬의 아름다운 자화상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다

영화에서 이미 환영으로 암시되었던 것처럼 둘의 만남은 오르페우스(마리안느)가 에우리디케(엘로이즈)의 명에 따라 뒤를 돌아봄으로써 에우리디케의 신화적 죽음으로 종결된다. 엘로이즈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환영 속에서는 흰색 수의를 입고 있는 듯하다.

몇 년이 흘러 마리안느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신의 오르페우스 신화 그림을 출품한다. 살롱 안에는 대부분 남자 방문객들로 가득 차 보이는데,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일단 18세기 중후반부터는 계급에 상관없이 파리의 수많은 대중들이 이 전시를 보러 올 수 있었다고는 한다. 아무튼 간에 두 그림은 이들이 선택한 이후의 삶을 요약한다. 마리안느는 남성화가들에게만 허락되었던 신화 그림을 본인의 관점을 담아 그려낼 수 있었으며, 회화 속 엘로이즈는 한 가정의 기품 있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었다. 읽은 바에 따르면 회화 중 더 높은 서열의 회화들은 살롱 전시회에서도 더 높은, 잘 보이는 곳에 걸렸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마리안느가 눈높이에서 자신의 작품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처럼 연출되었다.

마지막 장면은 사족이었다 아니다로 관객들의 의견들이 갈리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마지막 장면이 불필요했다고 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음악을 들으며 함께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나는 일단 전자에 속한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은, 엘로이즈가 듣던 죽은 음악과는 반대로 세속적이면서도 활기차고, 인물 내면의 태풍같이 몰아치는 감정을 잘 표현하기엔 직관적이고 무난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중간에 나오는 여성들의 합창 부분에서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운드가 신비롭고 활강하는 느낌을 주었던 것에 반해 이 음악이 주는 더없는 친숙함은 엔딩 장면을 되려 범상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맺으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8세기라는 배경과 여성들을 통해 현대 여성주의 담론이 와있는 현재의 지점과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을 보충 설명하기 위해 다시금 찾아보았던 18세기 여성 화가들의 실제 삶은, 선연히 타오르는 영화의 빛 이면에 깔려 있는 무심하게 짙은 그림자와도 같았다. 영화에서 엘로이즈는 '당신은 선택을 할 수 있으니 내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으나, 그럼에도 마리안느는 '그렇지 않다. 당신을 이해한다.'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 여성들이 살아간 삶과 선택을, 이들보다 훨씬 많은 선택지가 주어져 있는 우리는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서로 공모자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fugere non possum (they come fly)"라고 합창하는 여성들 사이에 어느 순간 관객이 심적으로 동화될 때, 영화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치유하고 각자의 주어진 한계를 넘는 어떤 비약을 꿈꾸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고전적인 풍경을 띄고 있는 이 영화가 은연중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담하고, 파격적이며, 현대적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영화관에서 감상한 후에 집에서 다시 감상하고, 같은 장면을 재차 돌려보고, 수많은 리뷰와 방송을 들으면서도 정작 내가 무슨 말을 해야 될지는 막막했다. 그러나 정작 글을 쓰기 시작하자 한 없이 길어진다. 영화 속 대사는 정제되어 적은 편임에도, 감독은 그 자리를 채우는 회화와 소리와 시선과 표정만으로 말해내기 어려운 것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마리안느가 말했듯 사랑이나 음악처럼 어떤 대상들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왜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써 내려간 연애편지를 몇 번이고 찢는가? 마음속에 타오르는 수많은 감정과 상념들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순간 한없이 진부하고 유치한 표현에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흩어지는 감상들과 이 감정을 흘려보낼 수 없어서 글을 쓰게 되고, 스스로 붓질을 멈출 때까지, 스스로 펜을 내려놓기까지 이 영화를 다시 꺼내어 보게 될 것이다. 

[Eurofilm 3. 프랑스]


참고 문헌

1. 사랑의 단상 |  롤랑 바르트 지음  |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
2. Bernadette Fort | Indicting the Woman Artist: Diderot, Le Libertin, and Anna Dorothea Therbusch  | Volume 23, 2004
3. 불의 정신분석 |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 김병욱 옮김 | 이학사 | 2007

<이미지 출처>
https://www.newyorker.com/culture/cultural-comment/portrait-of-a-lady-on-fire-is-more-than-a-ma
https://www.premiere.fr/Cinema/News-Cinema/Portrait-de-la-jeune-fille-en-feu-Tableau-de-maitre-- 
https://fr.wikipedia.org/wiki/Anna_Dorothea_Therbusch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ort 
https://imagesociale.fr/8490 
https://www2.bfi.org.uk/news-opinion/sight-sound-magazine/interviews/portrait-lady-fire-celine-sciam
https://25yearslatersite.com/2020/05/11/looking-further-into-a-portrait-of-a-lady-on-fire /

2020년 11월 3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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