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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ine Nov 26. 2023

이정홍, 괴인 (2022)

기생이 아닌 공생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정홍 감독의 괴이한 데뷔작을 보고 난 굵직굵직한 단상. 계급적인 관계도를 보여주는 건축 (현정과 정환의 집)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기생충>이 떠올랐다. 단, <기생충>에서 상승과 하강의 수직 운동이 지배적이었다면, 이 영화는 그에 ‘단절과 연결’이라는 키워드를 더하여 복잡 미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기생충>에서 집주인의 사생활에 선을 넘는 것이 금기였다면 <괴인>에서는 가진 자 만이 선을 넘을 수 있다는 점 또한 상반된다. 정환은 두 집을 연결하는 계단을 지나 기홍의 사적인 공간을 쉽게 드나든다. 반대로 정환의 ‘허락’ 혹은 ’선의 표시‘에도 불구하고 기홍은 주인과 같은 계단으로 본인 방에 돌아가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다. 혹은 점점 분리를 원하는 듯하다. (두 현관을 통해 별채로 돌아가는 반복적인 행동.)

사건의 발단이 되는, 기홍과 경준이 피아노학원에서 계단을 오르고, ‘괴인’이 2층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구조는 위 집의 구조를 떠오르게 한다. <기생충>에서 누군가가 지하실로 들어가려면 다른 가족은 밀려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것과도 도치된 듯 보인다. 그러나 <괴인>이 달려가는 방향은 꽤나 예상을 비껴간다.


이 영화는 두 계급 사이의 ‘기생’이 아니라 ‘공생’을 말한다. 자본을 가진 자들의 목적 상실과 권태, ‘월드컵을 보고 자란 세대’들 특유의, 상부에 구속받지 않고도 일확천금을 누리려는 꿈. 이 둘은 서로의 결핍을 상호보완한다.


기홍은 기우처럼 그 집을 사기 위해서, 수 십 년 뒤를 숨 막히게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그에게는 이미지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주인 부부의 선 넘는 행위를 견디거나, 눈감고 즐기면 될 뿐이다. 이를 감수해야 할 이유는 절대적인 생존의 목적이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집의 이미지를 자랑하기 위함이고 (어쩌면 집에 드나드는 애인 사이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과 함께), 한 순간의 달콤한 자기기만에 빠지기 위함이다.


<괴인>들에게는 최후의 자존심과 인간다움이 남아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모습,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염치없는 부탁은 앞뒤가 안 맞아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들은 벌레가 되지 않기 위해 괴인이 된다. 그리고 집이라는 한 공간 안에 모여든다.


어떤 ’괴인‘이 추가로 들어온다고 다른 ’괴인‘이 쫓겨나야 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풍선에 점점 더 공기가 주입되듯이 인물들 사이의 긴장과 집 내부의 압력은 계속 높아진다. 그 터지기 직전의 압력을 느끼며 끝나는 영화의 엔딩은, 동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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