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적인 사랑 vs. 영감을 주는 사랑
가까운 산으로 등산을 갔다 내려오던 길이었다. 비탈진 흙계단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바로 뒤에 오던 남녀의 대화 내용을 의도치 않게 듣게 되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전 여자 친구가 섹스 파트너로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며 연락이 왔는데 자신은 그런 식의 만남은 필요치 않다고 거절했다면서 동행하던 여자에게 "너도 만약 그런 식으로 나를 만날 거면 시작도 하지 말자."라고 했다.
이 대화는 호주에서 대학원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들려준 젊은이들의 교제에 대한 다른 에피소드가 생각나게 했다. 발달 심리학 강의 시간이었는데 '청소년의 2차 성징에 따른 심리적 변화'가 이날 강의의 주제였다. 교수님은 이 주제에 대한 토론 중에 벌어졌던 학부생들의 논쟁에 대해 들려주셨다. 한 남학생이 자신은 여자 친구와 정식 교재에 들어가기 전에 성병 유무에 대한 병원 검진 결과를 요구한다고 했고, 이에 강의실에 있던 여학생들이 그 남학생에게 격렬히 항의를 했다고 한다. 나는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브리즈번 현지 고등학교 여교사에게 어떻게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지 물었다가 문화충격을 불러일으킨 대답을 듣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남성이 리드하는 이성교제를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의 동양적 통념과 다르게 서양에선 여성의 신체 발달이 남성보다 빠르기 때문에 성에 눈뜨는 시기도 여자가 더 빠르고 이성교제에도 여자 아이들이 더 적극적이라는 것이었다.
서양은 오래전부터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나라 젊은 세대의 성의식의 변화는 나에게 세대차이로 인한 문화충격을 추가로 받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한 철 입고 버리는 패스트 패션처럼 사랑도 소비의 대상이 된 세태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남자 친구랑 끝나간다는 느낌이 들면 소개팅하러 가요. 공백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지금 남자 친구랑 잘 맞는 것 같진 않지만 없으면 외롭잖아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2011년 영화로 제작된 남성 작가가 쓴 베스트셀러 연애소설 <One Day>의 주인공 덱스터가 오버랩된다. 잘 나가는 방송 진행자로 인스턴트 연애의 달인이었던 그는 대학 졸업식날 알게 된 엠마를 소비적인 연애 상대가 아닌 힘들 때 기대는 친구로 20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덱스터는 엠마의 작가로서의 잠재력을 알아봤고 그녀가 현실에 매몰되어 작가의 꿈으로부터 멀어질 때마다 '주제넘게' 나섰다. 멕시코 요리 식당에서 매니저로 승진한 소식에 기뻐하기보단 글은 언제 쓸 거냐며 다그쳤고, 교사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엠마에게 그 자리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빈정거렸다. 엠마 역시 술과 마약에 취한 채 정체성을 잃어버린 덱스터를 가슴 아파하며 관계의 단절을 통보했다. 엠마와 덱스터는 상대가 지닌 내면의 빛을 알아봤고 그 빛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서로의 삶에 영감을 불어 넣었지만 친구와 연인 사이의 어딘가에서 매 번 엇갈렸다.
덱스터의 사랑의 힘을 알아본 건 엠마를 사랑한 또 다른 남자 이안이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엠마의 기일에 이안이 덱스터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로 작가는 사랑이 무엇인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당신을 환하게 빛나게 하는 에너지,
그것이 사랑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