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사람의 모양

맞춤 관계 지향적인 본능

by Karin an

하느님이 여자를 만들 때

아담의 갈비뼈를 빼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처음부터 여자는
누군가의 옆에서 만들어진 존재였다.


같은 흙으로 만들어지긴 했는데
다시 누군가를 지키는 쪽으로 놓인 몸.


그래서인지 여자의 삶에는
늘 ‘함께 있음’이 먼저 놓인다.


나보다 관계가,
욕망보다 역할이,
자기 자신보다 누군가의 안녕이 앞선다.


여자는 살면서 메꾸는 찰흙이 자주 된다.


아이 앞에서는 단단한 손이 되고,
남편 앞에서는 부드러운 표면이 되고,
부모 앞에서는 이해하는 얼굴이 된다.


직장에서는 티 나지 않게 분위기를 맞추고,
모임에서는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빚어지는 모양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 자연스럽다.


'내가 이럴 때 잘하면 되잖아.'
'엄마니까, 아내니까, 딸이니까.'


그 말들 속에서
여자는 조금씩
자기 모양을 덜 중요하게 여기는 법을 배운다.



가정은 여자의 삶에서
종종 서포터의 자리로 시작된다.


누군가의 하루가 부서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일,
관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틈을 메우는 일,
감정이 터지지 않도록 먼저 삼키는 일.

그 일은 보상받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이니까, 가족이니까, 그러니 희생의 기본이 당연하니까.


그 사이에서
여자의 사회적 관계는
조금씩 밀려난다.


약속은 쉽게 미뤄지고,
연락은 줄어들고,
기존 친구는 “바빠졌구나”라고 말하며 점점 멀어진다.


문득 돌아보면
함께 웃던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해진다.


내가 변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많은 역할을 떠안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딸이 되는 동안
나는 더 이상 ‘한 사람’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역할을 맡은 사람들의 네트워크만이

때마다 남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사람의 모양은 남아 있지만
외부 사람의 자리는 줄어든다.


찰흙은
너무 오랜 시간 만져지면
결국 모양을 만들 힘을 잃고 굳어버린다.


너무 많은 손을 거친 찰흙은
어느 것이 자신의 형태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여성의 삶도 그렇다.



관계를 지키느라
너무 자주 맞춰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묻는 질문 자체가 사라진다.


답이 없는 이 글은 그저 각자에게 묻기 위해 쓰였다.

관계를 지키기 위해
사람의 모양을 늘 다시 새로고침을 하는 가장 적극적인 삶이
여자의 삶이지 않을까?



사회적 관계를 잃어가며
가정을 떠받치는 삶,
사람보다 역할이 먼저 불리는 삶 속에서

어떻게
다시 사람의 모양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나씩 꺼내려한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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