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멀어질 때

역할에 따라 재편되는 여자들의 우정에 관하여

by Karin an


여자 친구들과의 관계는
갑자기 끊어지지 않는다.


대신 아주 천천히,
마치 흙이 조금씩 닳아 없어지듯
조용히 멀어진다.


약속이 줄어들고
대화가 짧아지고
서로의 사정을 묻는 말이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우리는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 못 나오는지,
왜 답장이 늦는지,
왜 먼저 연락하지 못하는지.


누군가는 아이를 키우고,
누군가는 가정을 돌보고,
누군가는 회사에서 버티고,
누군가는 그 모든 걸 동시에 떠안고 있다.


여자의 삶은
어느 시점부터
생애주기 속에서 서포터의 자리로 이동한다.


누군가가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고,
관계가 삐걱거리지 않도록 메우고,
가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다.


그 역할은
크게 선언되지 않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조금 더 하면 되지.”
“지금은 내가 참고 넘어가야지.”

그 말들이 쌓여
삶의 중심이 바뀐다.


그 사이
친구는 가장 먼저 밀려난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장 이해해 줄 것 같아서.


여자의 우정은
항상 마지막으로 남겨진다.


아이 엄마가 되면
아이 엄마들과 연결되고,
이사를 가면
그 동네의 관계가 생기고,
직장이 바뀌면
그 자리의 사람들과 묶인다.


그 관계들은
그 시기를 살아내기 위해 꼭 필요하다.


서로의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실질적인 동맹이다.


하지만 그 관계들은
그 역할이 끝나면
조용히 흩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유년의 나를 기억하던 친구들,
아직 결론 나지 않았던 나를 알던 사람들은
조금씩 멀어진다.


싸우지 않았고,
상처를 주지도 않았다.


그저
삶이 요구하는 방향이 달라졌을 뿐이다.


여자의 생애는
자주 이런 구조를 가진다.


자라면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형태를 지켜주는 쪽으로
무게가 옮겨간다.


마치 흙처럼.

흙은
자신의 모양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 위에 무엇이 올라오든
받아들이고,
기르고,
지탱한다.


그래서 흙 위에선
많은 생명이 살아가지만
흙 자체는
눈에 띄지 않는다.


여자의 삶도 그렇다.

관계를 살리느라
사람의 모양은 흐려지고,
역할은 선명해진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동료.


그 사이에서
‘친구로서의 나’는
점점 조용해진다.


그래서 친구들이 멀어질 때,
우리는 사람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한 시절의 나를 증명해 줄 목격자를 잃는다.


같은 농담에 웃던 나,
같은 밤을 버티던 나,
아직 어디로 갈지 몰랐던 나.


그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그리고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나의 엄마들이 자녀들을 독립시키고 나면

친구들과 각종 모임을 만들고
서로를 찾아 여행을 가고,
밥을 먹고,
다시 뭉치는 이유는.

그건 외로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다시 잠시라도
자신만의 모양으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서포터가 아니라,
역할이 아니라,
누군가의 땅이 아니라.

그저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으로.


여자의 우정은
쉽게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무게 아래
잠시 묻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다시
그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내며
서로를 부른다.


“너, 잘 살았구나.”
“나도, 여기까지 왔어.”

그 말 한마디로
다시 사람의 모양을 회복하면서.



흙은
끝내 생명을 품는다.

사람을 키우고,
관계를 지탱하고,
시간을 받아내며
자기만의 층위를 만든다.

여자의 삶도 그렇다.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깊이를 만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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