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건너는 여자들의 시간
인간이 평생 가장 많이 붙잡고 씨름하는 문제는
결국 관계라고 한다.
삶의 고민 대부분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나도 어느 순간부터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그래서 매번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나를 조율하며 살아간다.
결혼이란 단계를 지나가면
관계는 더 이상 둘의 문제가 아니다.
집안이 되고, 가족이 되고,
이해해야 할 사람의 수는 순식간에 늘어난다.
각자 역할로서 요구는 많아지고
조율은 집요 하리라만큼 복잡해지며
그 혼란 속에서 길을 잃는 사람들을
나는 숱하게 보아왔다.
갑자기 늘어난
여러 역할은 갑작스럽게 한 사람에게 쏟아진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여자 쪽이다.
맞벌이를 해도
남자는 여전히 ‘바깥일을 하는 사람’이고
여자는 바깥일을 하면서도
집안의 교육, 육아, 가족 행사의 중심을 맡는다.
물론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아마 이미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있을 것이다.
스무 해 전,
외국인 여자 친구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결국 같이 사는 건 두 사람인데,
왜 그렇게 다른 가족들의 의견이 큰 거야?”
라고
그 질문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결혼 이후의 삶은
20년 전 친구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지금 만나는 동생들과 고객들의 이야기 사이에서
듣다 보면, 놀랄 만큼 크게 다르지 않다.
문화가 바뀌는 데는
대략 20여 년 정도의 긴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체벌과 유아교육의 포커스는 변했지만
입시와 돌봄, 가정의 구조는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선 엄마가 되면
인생은 더 선명하게 바뀐다.
이제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딸,
아내, 며느리,
그리고 회사에서의 나.
각각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한 몸 안에 동시에 들어오면
서로를 조금씩 밀어낸다.
예전에 읽은 문장이 있다.
사람은 동시에 다섯 가지 이상의 중요한 역할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이상이 되면
어느 하나는 반드시 이탈된다고.
엄마, 딸, 아내, 며느리, 회사의 나.
이 다섯 가지를 붙잡는 순간
‘나 자신’은 자연스럽게 빠진다.
반대로
나 자신을 포함시키면
어느 역할 하나는 내려놓아야 한다.
여자들은
이 사실을 너무 이르게 배운다.
랜디 주커버그는 『픽 쓰리(Pick Three)』에서
삶의 큰 덩어리들—일, 가족, 수면, 건강, 친구
중 한 번에 세 가지만 선택하라고 말한다.
모두를 다 지키려 하면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다고.
그 조언은 차갑지만
엄마가 된 여자들의 현실과 정확히 겹친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일하는 엄마가 느끼는 죄책감은 비슷하다.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는 미안함,
함께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자책,
그리고
“그래도 이게 맞는 선택인가”라는 질문.
여자들은 매일 그 질문 앞에서 줄을 탄다.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일과 양육 사이에서,
나와 관계 사이에서.
어릴 땐
사랑이 인생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여성성이란 말조차
‘얼마나 제대로 사랑받을 준비가 되었는가’로
해석되지 않던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선택받고,
함께하는 것이 삶의 답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사랑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사랑은 감정이지만
관계는 기술이고, 조율이고,
지속의 문제다.
그래서 이 나이의 여자들은
사랑보다 관계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역할을 거치는 여정을 지나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내려놓는 것도 배우고,
탈피하듯 변신하기도 한다.
무엇도 놓치지 않으려는 삶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잠시 내려놓을지 아는 삶.
완벽한 균형이 아니라
의식적인 불균형을 감당하는 힘이
우리를 어른으로 만든다.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해도
스스로를 완전히 잃지 않는 법을
천천히 연습하는 시간.
그 줄타기 위에서
여자들은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기 삶을 건너고 있다.
얼마 전
암컷 카멜레온이
죽음에 이르러 온몸으로 색을 뿜어내는 영상을 보았다.
감정을 색으로 표현된다는 카멜레온을 바라보니
묘하게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여자의 중년은 인생에서 가장 많은 색을
한꺼번에 입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색이
결국에는
사랑 그 자체임을.